1부 · 3장 · 9화
9화. 한 번도 살지 않은 사람
잔영기록자 · 한국어
빈 닻 안쪽에는 방이 아니라, 방이 되기 위해 모인 물건들이 있었다.
발밑에는 불탄 적 없는 화로의 돌이 놓여 있었다. 돌 틈에는 재가 없고, 손을 대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만 남았다. 왼쪽 벽처럼 선 것은 굵은 뿌리 골격이었다. 뿌리는 어느 집의 나무도 아니면서 문턱과 기둥을 흉내 냈다. 천장에는 거리추 여러 개가 서로 다른 높이로 매달려 있었다. 추가 흔들릴 때마다 바깥의 섬과 중앙 사이 거리가 접혔다가 풀렸다. 화로와 뿌리방과 거리추는 한 장소가 될 수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빈 닻은 그 어긋남을 완벽한 고향의 한 방처럼 눌러 붙들고 있었다.
그 앞에 세른이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어린 아이 하나가 뛰어갔다. 아이는 젖은 신발을 벗어 화로 곁에 놓고, 낮은 식탁 앞에 앉았다. 누군가가 국그릇을 밀어 주었고,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이 세른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순간 그 장면은 내 쪽으로 기울었다. 손목에 흉터가 없는 내가 실습실 문을 열고, 아무 일도 잘못되지 않은 얼굴로 호명자의 도구를 받아 들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다음 조사지를 알려 주었다. 그 삶에는 돌아가서 사과해야 할 일도, 약속을 확인해야 할 동료도 없었다.
그 장면들은 내 앞의 돌과 뿌리 위에 겹쳤지만, 손을 뻗으면 잡히지 않았다. 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빈 닻이 가능했을 장면과 그 장면에 매달린 감정을, 현재 물질 위에 얇게 덮어 놓은 것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겠지.” 세른이 말했다.
“아니요.” 나는 흉터 있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겹친 손목은 매끈했지만, 내 손가락 아래에는 오래된 살의 단단한 솟음이 있었다. “당신이 그곳에서 자랐다고 느낀 일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생각도 없어요.”
세른의 어린 모습이 식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는 누군가에게 오늘은 바람이 세지 않으니 부두까지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바깥에서 구조 밧줄을 붙든 사람들의 젖은 손을 몰랐다.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함께 살 법한 가족의 모양과, 안전한 집으로 돌아갈 순서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난 역사라는 뜻은 아니죠.” 내가 말했다. “여기는 과거가 아니에요. 되돌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데려오는 곳도 아니에요. 한 번도 실현되지 않은 계획이, 우리에게 그럴듯한 삶을 보여 준 거예요.”
세른의 눈이 좁아졌다. “그 구분이 네게는 편하겠지.”
“편하지 않아요.” 나는 화로 돌 위에 손바닥을 댔다. “사고가 없던 내 삶을 보면, 지금의 흉터도 약속도 잠깐은 쓸데없는 실수처럼 보여요. 그래도 그 장면이 내게 슬픔을 준다고 해서, 여기 있는 주민들의 삶보다 내 것이 먼저라고 할 수는 없어요.”
바깥에서 둔탁한 충격이 울렸다. 거리추 하나가 크게 흔들렸다. 그 떨림과 함께 화로 돌 아래로 아르마의 물통, 에단이 안은 아이, 마온 어머니의 재 그릇이 비쳤다. 그들은 현실 섬과 함께 빈 닻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오르메의 방은 이들을 가족으로 맞이할 준비가 된 듯 넓어졌지만, 그 넓이는 사람들의 현재 자리를 비워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걸 만든 사람은 당신이에요.” 내가 말했다. “뿌리 골격과 거리추와 화로와 빈 결속부를 당신 손으로 맞췄죠. 그때부터 이건 저절로 흘러온 기억이 아니라 당신의 현재 선택이에요. 주민을 재료로 써도 된다는 선택까지, 기억이 대신해 주지는 않아요.”
세른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 곁의 아이가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 했고, 세른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바깥으로 끌려오는 주민들에게 닿아 있었다.
“군도가 무너지는 걸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그래서 지금 구조하고 있어요.” 나는 말했다. “무너지는 섬을 살리려면 사람을 하나의 고향에 눌러 담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도린은 배를 움직이고, 마온은 살아 있는 뿌리를 찾고, 리아는 지금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어요. 당신도 그걸 봤잖아요.”
세른의 어린 모습은 식탁 위에 놓인 빈 그릇을 만졌다. 그 손가락은 물에 불어 있지 않았고, 손등에는 그물을 당긴 자국도 없었다. 그러나 세른이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입술을 굳게 다무는 까닭은 알 것 같았다. 누구라도 그런 방에서 불린 이름을 잃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이용해 그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실제라는 말과, 그 감정에 따라 타인의 삶을 재료로 삼아도 된다는 말은 다른 것이었다.
“당신이 그 아이를 아끼는 걸 부정하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주민들이 끌려오는 걸 멈춰 달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지금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래서 책임도 당신에게 있어요.”
세른은 손에 들었던 납추를 꽉 쥐었다. “책임.”
그는 그 단어를 비웃지 않았다. 다만 화로 돌 위에서 구르는 작은 돌을 발끝으로 막았다. 바깥의 무게가 한 번 더 빈 닻을 당기자, 뿌리방 벽에는 금이 가고 거리추의 그림자가 길게 흔들렸다. 세른은 그 금을 보며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 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린 소리가 아니라, 갑판에서 늘 듣던 짧고 정확한 목소리였다.
“손목을 보여 줘.”
나는 빈 닻의 벽이 되어 버린 뿌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수피 사이로 네아의 손이 들어왔다. 그녀는 내 손목의 흉터를 집게로 집지 않았다. 흉터 가장자리에 검은 퇴비를 얇게 바르고, 내 손목과 갑판 난간을 수피 끈으로 느슨하게 묶었다. 끊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는 매듭이 아니라, 내가 어느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물질 닻이었다.
“여기서 했던 약속을 말해.” 네아가 말했다.
“기억이 정해 주는 행동은 따르지 않겠다고.”
“그 다음은?”
“현재의 증거와 사람을 먼저 보겠다고.”
네아는 수피 끈을 한 번 더 눌렀다. “좋아. 흉터는 네가 잃은 것을 증명하는 표식이 아니야. 그 뒤에 누구와 어떻게 서기로 했는지 알려 주는 자리야.”
그 말이 닿자 흉터 없는 내 모습은 조금 멀어졌다. 그 삶이 나쁘거나 거짓이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삶을 부러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러움이 내 손목을 대신 잡거나, 바깥에서 끌려오는 사람들을 대신 구할 수는 없었다. 내 손은 네아의 손을 잡았다.
빈 닻이 다시 크게 울렸다. 이번에는 바깥의 현실 주민들이 뿌리방 안으로 반쯤 끌려 들어왔다. 아르마의 물통은 화로 돌에 부딪혀 굴렀고, 에단은 아이를 품은 채 뿌리 골격에 매달렸다. 마온은 다리 쪽에서 줄을 붙들고 있었지만, 갈라진 뿌리가 그의 발밑을 중앙으로 밀고 있었다. 도린의 목소리가 멀리서 짧게 날아왔다.
리아는 바깥에서 현재 지도와 가능성 지도를 함께 붙들고 있었다. 빈 닻의 힘이 강해질 때마다 가능성 지도 위의 수피 모형이 갑판 쪽으로 밀려났지만, 그는 그 모형을 현재 지도 위에 억지로 포개지 않았다. 물매듭 하나가 끊어질 듯 당겨지면, 리아는 어느 섬의 실제 거리가 짧아졌는지 먼저 읽고 도린에게 외쳤다. 지도는 빈 닻을 정지시키지 않았다. 다만 사람과 배가 어디에서 끌려가고 있는지를 드러내, 다른 사람들이 붙들 손을 찾게 했다.
“셋째 줄, 받쳐!”
첫물호가 기울지 않도록 도린은 줄의 무게를 바꾸고 있었다. 해류는 배를 중앙에서 밀어내는 물길만 찾아 주었다. 그것이 사람을 건져 올리거나 뿌리를 잇지는 않았다. 수림은 마온이 표시한 살아 있는 결에만 다리를 보탰고, 화염은 네아가 분리한 실제 화덕의 온기를 주민들의 손으로 돌렸다. 어느 흐름도 다른 흐름의 일을 대신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 닻은 한꺼번에 모두를 붙잡을 수 없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버티는 현재에 균열이 났다.
세른이 그 균열을 보았다. 그의 손이 빈 결속부 옆의 가는 배열 하나에 닿았다. 그것은 자기 어린 시절의 식탁과 이어진 뿌리였다. 거기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돌아오는 가족의 의자와, 고장 나지 않는 부두로 향하는 짧은 길이 겹쳐 있었다. 그 배열을 끊으면, 세른이 붙들어 온 방의 한쪽이 먼저 무너질 터였다.
아르마의 물통이 다시 굴러, 화로 돌 아래의 틈으로 빠지려 했다. 세른은 망설이는 동안 그 물통을 바라봤다. 그리고 뿌리칼을 꺼내 자기 배열을 잘랐다.
말이 새겨진 줄은 없었다. 잘린 것은 화로 뒤에서 식탁 모양을 지탱하던 수피 한 가닥과, 그 끝에 매달린 작은 거리추였다. 추가 바닥에 부딪히자 세른의 어린 모습은 손을 뻗은 채 옅어졌다. 대신 아르마의 물통이 중앙의 틈에서 벗어나 갑판 쪽으로 미끄러졌다. 에단과 아이를 당기던 뿌리의 힘도 약해졌다.
세른은 잘린 수피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 조각은 단지 결속의 일부였지만, 그에게는 식탁 끝에서 돌아보던 아이의 어깨와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다시 결속부에 끼우지 않았다. 마온이 아르마를 끌어올리는 동안, 세른은 뒤따라 밀려 온 노인의 팔을 잡아 뿌리의 갈라진 틈에서 빼냈다. 노인은 그가 누구인지 묻지 못하고 기침만 했다. 세른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놓자마자 바깥쪽 통로를 확인했다.
“잡아!” 세른이 외쳤다.
그 한마디는 투항의 말이 아니었다. 그는 빈 닻을 부수겠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르메를 포기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바로 눈앞에서 현실 주민이 재료가 되는 것을 자기 손으로 한 번 끊었다. 마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르마의 팔을 잡아당겼고, 도린의 셋째 줄이 에단의 등 뒤를 받쳤다. 네아는 아이의 젖은 소매에 남은 화덕 재를 손바닥으로 눌러, 중앙의 온기가 아니라 현재 화로의 층으로 돌려보냈다.
빈 닻의 방은 한 번 더 비틀렸다. 세른은 무너진 식탁 쪽을 보지 않고 주머니에서 휴대용 결속부를 꺼냈다. 금속 조각들이 작은 틈에서 서로 맞물렸다. 그는 첫 룬 파편이 흔들리는 방향을 읽어, 거기에 남은 하나의 좌표를 결속부 안으로 옮겼다. 바깥의 지도까지 닿지 않는, 다음 흔적이 있을 정확한 위치였다. 그는 숫자나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 납추의 길이와 결속부의 홈이 맞물리는 자리로만 그 좌표를 복사했다.
“그걸 가져가면 또 먼저 가겠군요.” 내가 말했다.
“그래야 한다.” 세른은 결속부를 닫았다. “네가 두 지도를 지키고 싶다면 지켜. 나는 무너지는 곳을 하나씩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도 그의 길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바깥 군도는 아직 기울고 있었고, 빈 닻이 풀리는 동안 가장 가까운 사람을 붙드는 일이 우선이었다. 세른은 뿌리 골격의 옆 틈으로 몸을 돌렸다. 그 틈은 첫물호 쪽이 아니라 바깥 물길과 이어져 있었다. 도린이 구조선을 돌릴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그가 떠나는 길은 아무도 내주지 않았다. 빈 닻이 무너져 남긴 틈과, 세른이 미리 맞춰 둔 가벼운 납추의 방향이 우연히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것이 계획된 탈출이었다고 말할 만한 표식은 없었다. 그는 주민을 끌어내는 데 쓰던 손으로 마지막 뿌리 결을 밀어 길을 넓히고, 물이 드는 바깥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를 붙잡으려고 줄을 던지지 않았다. 줄 하나라도 빼면 아직 갑판으로 오르지 못한 사람이 다시 중앙으로 쏠릴 터였다.
“세른.” 네아가 바깥에서 불렀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뒤돌아, 반쯤 무너진 화로와 현실 주민들을 한 번 보았다. 그 얼굴에는 후회도 결심도 함께 있었지만, 어느 쪽도 상대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는 결속부를 품에 넣고, 뿌리 골격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를 쫓지 않았다. 네아의 수피 끈을 잡고 빈 닻 밖으로 몸을 끌어냈다. 갑판에 무릎을 짚자 도린이 조타륜을 돌리는 손과, 마온이 뿌리다리를 붙드는 어깨가 보였다. 리아는 젖은 바탕지 위에서 물매듭이 끊어지지 않게 두 손을 펴고 있었다.
내가 붙들 수 있었던 것은 세른의 뒤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는 줄이었다. 나는 그 줄을 마온에게 넘겼고, 마온은 끌려오던 주민의 허리를 감쌌다. 세른을 놓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를 붙들려다 이 손을 놓는다면, 빈 닻이 또 한 사람의 현재를 가져갈 것이었다.
중앙의 오르메는 더는 하나의 섬으로 버티지 못했다. 바닥의 거리추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풀리고, 집의 기둥으로 쓰였던 나이테가 수피 모형 쪽과 현실 섬 쪽으로 갈라졌다. 화로의 온기는 매끈한 방을 떠나 각자의 재 층을 찾아 흩어졌다. 물과 뿌리와 화덕의 기록이 세 흐름으로 쏟아지며, 빈 닻과 오르메는 한꺼번에 붕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