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2장 · 9화
9화. 한 번도 떠나지 않은 항해
잔영기록자 · 한국어
첫 파도는 발목에도 닿지 않았지만 기함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물은 마른 해저의 가장 낮은 틈을 찾아 흐르지 않았다. 첫 룬 파편이 정한 길을 따라 모래 언덕을 거슬러 올랐다. 얇은 물길이 기함의 용골 아래로 모이자 거대한 선체가 앞으로 미끄러졌다.
함대가 그 뒤를 따랐다.
아직 배에 남은 주민들이 난간을 붙잡았다. 강제된 출항 방향은 끊겼지만, 갑판에서 내려올 물리적인 길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함에 연결된 검은 줄이 다른 배들을 차례로 당겼다.
도린이 삼중 매듭을 줄 끝에 만들었다.
“기함에 올라가겠습니다.”
“왼손으로는 오래 못 버팁니다.”
수피 붕대가 이미 피와 바닷물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오래 있지 않을 겁니다.”
그는 줄을 던졌다. 고리가 기함 난간에 걸렸고, 첫 파도가 팽팽한 줄 아래로 지나갔다.
네아와 내가 먼저 뿌리를 타고 줄에 올랐다. 오르나가 명부를 등에 묶고 뒤따랐다. 사브는 마른 해저에 남았다. 집마다 나눈 귀항불을 함대의 퇴로에 세워 둘 사람이 필요했다.
“돌아올 곳을 잊지 마라!”
사브의 외침이 불꽃을 따라왔다.
기함 갑판에는 선원이 없었다.
대신 다섯 항해의 동작이 배를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발이 방향타 주변의 물기를 밟았고, 밧줄은 손 없이 당겨졌다. 망치가 저절로 돛대 이음을 두드렸다.
도린이 갑판에 내려서는 순간 모든 동작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오른발은 얕은 물의 모래톱을 피하려 했고, 왼손은 구조 밧줄을 찾았다. 두 어깨는 부러진 돛대를 받쳤다. 오른쪽 갈비뼈는 차가운 물에 짓눌렸고, 가슴은 목적지도 없는 출항을 서둘렀다.
다섯 사람이 한 몸에 겹쳐졌다.
“하나씩 돌려보냅니다.”
나는 도린의 발밑에 열린 고리를 만들었다.
기함은 실제 물 위에 떠 있었지만 얕은 용골이 너무 깊이 잠겨 있었다. 파편이 다섯 항해를 한 배에 억지로 끼우며 용골의 쓰임까지 뒤집은 탓이었다.
앞에는 검은 모래톱이 솟아 있었다.
그대로 부딪치면 선두의 작은 배들이 기함 뒤에 깔릴 것이다.
도린의 오른발이 방향타를 찼다.
“발로 조종해야 합니다.”
첫 번째 기억이 말했다.
도린은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소금배의 얕은 용골이 모래를 읽던 각도, 오른발로 방향을 미세하게 바꾸던 버릇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 배의 귀항은 제가 정합니다.”
그는 방향타를 출항로 바깥으로 꺾었다.
기함이 모래톱 옆을 스쳤다. 뒤따르던 배들에 처음으로 굽은 항적이 생겼다.
곧게 떠나기만 하던 함대가 한 번 돌아섰다.
도린의 오른발에서 낡은 소금 냄새가 빠져나왔다. 작은 키잡이 잔영이 갑판에 나타나 자기가 만든 굽은 항적을 보았다.
잔영은 모래톱 너머의 항구를 향해 모자를 벗었다.
첫 항해가 돌아갔다.
기함 뒤에서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곡물선 한 척이 물길 밖으로 밀려났다. 난간에 매달린 주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도린의 왼손이 움직였다.
삼중 견인 매듭.
그는 수피 붕대 위로 새 줄을 감았다. 첫 고리를 곡물선의 부러진 난간에 던지고, 둘째로 기함의 힘을 나눴다. 셋째 고리를 조이는 순간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놓으세요!”
네아가 외쳤다.
“지금 놓으면 저 배가 뒤집힙니다.”
도린은 줄을 자기 허리에 감지 않았다. 기함의 돛대 아래에 걸고, 남은 끝을 곡물선 주민들에게 던졌다.
“같이 당기세요!”
갑판의 사람들이 줄을 잡았다.
구조 기억은 도린 한 사람의 몸에 머물지 않았다. 현재의 사람들이 힘을 보태자 매듭의 압력이 여러 손으로 나뉘었다.
곡물선이 물길로 돌아왔다.
안개 구조선의 밧줄잡이 잔영이 도린의 왼손에서 떨어져 나왔다. 잔영의 손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지만 도린의 손에는 현재의 상처와 수피 붕대가 남았다.
둘은 같은 상처가 아니었다.
밧줄잡이는 구조한 두 척이 돌아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다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 항해가 돌아갔다.
검은 구름이 기함 위에 모였다.
실제 하늘은 맑았지만 네 번째 항해의 폭풍이 선체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돛대가 부러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도린의 어깨가 저절로 들려 무너지는 나무를 받쳤다.
세 번째 기억, 곡물선 목수의 젖은 톱밥 냄새가 퍼졌다.
“이 돛대는 돌아오는 도중 부러졌습니다.”
도린은 갑판에 굴러다니는 망치를 잡았다. 손바닥에 반동이 울렸다.
“그러니 부러짐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는 낡은 이음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만든 접이식 돛대 관절을 꺼내 현재 기함의 균열에 맞춰 다시 깎았다.
한 번 접힌 돛대가 바람을 흘려보냈다. 검은 구름이 돛을 뜯지 못하고 지나갔다.
곡물선 목수의 잔영이 톱밥 묻은 손으로 새 이음을 만졌다.
자기 기억과 다른 수리법이었다.
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항구의 조선소 쪽으로 돌아섰다.
세 번째 항해가 돌아갔다.
폭풍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함 아래의 물이 검게 변했다. 물속에서 검은 암초가 솟아 방향타를 찢었다. 네 번째 기억의 침몰이 현재 배를 자기 결말로 끌고 갔다.
도린이 오른쪽 갈비뼈를 감싸 쥐었다.
“물이 차오릅니다.”
갑판은 젖어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호흡이 짧아졌다. 침몰한 연락선의 마지막 감각이 폐를 눌렀다.
네아가 그 기억 전체를 집으려 했다.
“기다리세요.”
나는 덧댄 방향타의 압력을 읽었다.
연락선의 선원은 침몰 직전까지 방향타를 수리했다. 돌아오지 못했지만, 마지막 행동은 바다 밖으로 떠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암초를 피해 육지 쪽으로 선수를 돌리려 했다.
파편은 침몰이라는 결말만 떼어 ‘떠남’의 증거로 사용했다.
“거짓 항로입니다.”
나는 검은 물 위에 퇴비를 뿌렸다.
“이 사람은 바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려다 가라앉았습니다.”
도린이 오른쪽 갈비뼈의 압박을 견디며 덧댄 방향타를 잡았다. 네아가 침몰의 마지막 순간과 그 전의 의도를 잇는 검은 방향만 끊었다.
“침몰은 목적지가 아니다.”
내 호명에 검은 암초가 갈라졌다.
기함은 암초를 가로지르지 않고 육지 쪽으로 선회했다. 연락선 선원의 잔영이 물속에서 떠올랐다. 오른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시선은 돌아서는 배를 따랐다.
그는 자기가 끝내지 못한 방향을 확인한 뒤 물속으로 내려갔다.
네 번째 항해가 돌아갔다.
남은 것은 에르바 마지막 기함의 선장이었다.
기억에는 귀항이 없었다.
출항 준비, 역할 확인, 닫히지 않은 함수 결속부.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떠나는 장면에서 잘린 기억이었다.
선장 잔영이 갑판 끝에 나타났다.
얼굴은 없었다. 마지막 출항 명부의 역할들이 층층이 붙어 머리와 몸을 이루고 있었다.
“전원 승선.”
잔영이 말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오르나가 물었다.
“전원 승선.”
“바다 밖에서 무엇을 합니까?”
“전원 승선.”
“돌아올 사람은 누굽니까?”
“전원 승선.”
오르나는 등에 멘 명부를 내렸다.
평생 빚이라고 믿은 이름들이 판마다 적혀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선장은 이름을 읽지 않았다. 사람을 보지도 않았다. 비어 있는 역할을 채우라는 명령만 반복했다.
“에르바를 위해 떠나는 게 아니었군요.”
그녀가 말했다.
“이건 출항을 위해 에르바를 쓰는 겁니다.”
선장 잔영이 팔을 들었다.
모든 목판이 오르나의 손에서 날아올랐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몸을 스치며 기함 함수로 모였다.
오르나는 마지막 판을 붙잡고 버텼다. 뿌리처럼 굳은 밧줄이 오른쪽 무릎을 휘감았다. 선장 잔영이 팔을 내리자 그녀의 몸이 갑판에 쓰러졌다.
무릎이 비틀리는 둔한 소리가 났다.
도린이 줄을 던져 오르나의 허리를 잡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지만 오른발에 힘을 온전히 싣지 못했다.
“명부를 놓으세요.”
“아니요.”
오르나는 판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역할표는 사람들이 살려고 만든 겁니다. 저것에게 돌려주지 않아요.”
그녀는 오른쪽 무릎을 끌며 함수까지 갔다. 도린의 여섯 번째 접합부를 검은 입에 밀어 넣었다.
부품은 여전히 맞지 않았다.
다음 부품이 들어올 자리를 남기는 이음은 출항을 닫지 않았다. 기함 전체가 불완전한 동작 사이에서 흔들렸다.
선장 잔영이 처음으로 다른 말을 했다.
“관찰 기준 복구.”
갑판에 내 젖은 발자국이 나타났다.
헤아린에서 베낀 첫걸음이 기함의 선수부터 바다 밖까지 곧은 선을 만들었다. 모든 물길과 배가 그 선에 맞춰 정렬됐다.
나는 발을 떼려 했지만 같은 자리에 다시 놓였다.
파편은 내 몸을 조종하는 대신 맹세의 첫 동작을 되풀이했다. 내가 저 흔적과 같은 각도로 서 있는 한, 함대는 그것을 현재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발자국을 지우면 됩니까?”
네아가 물었다.
“다시 생길 겁니다.”
“그러면 다른 방향으로 걸어요.”
“제 동작을 따라올 겁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 기준이 된다면, 걷지 않은 길을 불러야 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실한 이름의 맹세는 이름을 밝히는 주문이 아니었다. 호명하는 사람이 지금 책임질 관계를 선언하는 약속이었다. 헤아린에서 나는 진실을 숨기지 않겠다는 첫걸음으로 맹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보다 말을 먼저 놓았다.
“나는 이 항구가 떠나야 한다고 부르지 않는다.”
젖은 발자국이 흔들렸다.
“남아야 한다고도 대신 정하지 않는다.”
검은 선이 둘로 갈라졌다.
“돌아온 기록이 없더라도, 지금 돌아가려는 사람의 길을 부른다.”
나는 발자국 바깥의 빈 갑판에 손을 댔다.
누구도 걷지 않았고, 파편도 베끼지 못한 자리였다.
귀항불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사브가 해저에 늘어놓은 등잔들이 하나씩 불타올랐다. 수림의 뿌리는 그 불들을 현재의 집과 이어 주었다.
“기록되지 않은 귀항로.”
내가 호명했다.
불꽃이 물 위에 굽은 길을 만들었다.
첫 항해가 피한 모래톱, 둘째가 구한 배, 셋째가 수리한 돛대, 넷째가 돌아서려 한 암초를 모두 지나 모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과거 어느 항해와도 같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긴 기술을 모두 품었다.
젖은 발자국이 꺼졌다.
관찰 기준이 깨지자 함대가 정렬을 잃었다. 다섯 번째 선장 잔영의 몸에서 명부가 떨어졌다. 얼굴 없는 형상은 새 길 앞에 서서 마지막 명령을 반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린이 함수 결속부에 손을 얹었다.
“이 항해는 아직 떠난 적이 없습니다.”
오르나가 다친 무릎으로 옆에 섰다.
“그러니 돌아오는 법부터 만들 수 있어요.”
다섯 번째 기억은 사람 모습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출항 충동만 여섯 압점에서 빠져나와 검은 물에 녹았다. 닫히지 않은 함수에는 빈 자리와 도린의 여섯 번째 접합부가 남았다.
기함이 귀항로를 향해 선수를 돌렸다.
뒤따르던 배들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출항 방향을 잃은 주민들이 갑판마다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모렌의 불빛을 보고 내려 달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항구 밖으로 나가 보고 싶다며 돛을 붙잡았다. 같은 배에서도 마음이 갈렸다.
오르나는 오른쪽 무릎을 끌며 기함의 종까지 갔다. 출항종과 같은 모양이었지만 추에는 아무 압력도 남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울려야 합니까?”
그녀가 물었다.
“명부에 없는 말을 하세요.”
오르나는 종을 한 번 쳤다.
“모렌으로 돌아갈 배는 기함의 불을 따라오세요.”
울림이 함대 사이로 퍼졌다.
“바깥으로 나갈 사람은 오늘 이 배에서 내리세요. 물과 식량을 실은 배를 다시 만들겠습니다.”
두 번째 울림에는 강제하는 압력이 없었다. 먼 배의 주민들이 서로 줄을 풀고 돛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떠나고 싶은 사람도 지금의 잔영선에서는 내려오기로 했다.
도린이 부축하려 하자 오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간을 잡고 천천히 걸었지만 다친 다리를 숨기지 않았다.
“항로지기가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항구가 흩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방금도 길을 알렸습니다.”
“따르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죠.”
오르나는 명부 목판을 갑판에 펼쳤다. 역할 이름 옆마다 빈 칸을 팠다. 다음에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직접 적고, 일이 끝나면 지울 자리였다.
오래된 역할표가 현재의 약속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함수 바깥쪽에서 아주 작은 마찰음이 났다.
파편의 외부 이음에 가느다란 금속 침이 꽂혀 있었다. 침 끝의 여섯 홈이 새 귀항로의 굴곡을 차례로 눌러 담았다.
“누가 연결했습니다.”
네아가 침을 잡으려 했다.
금속은 손이 닿기 전에 부러졌다. 바깥쪽 절반이 선체 아래로 빠져 실제 파도에 휩쓸렸다.
안개 너머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이름도, 배도 없었다.
다만 멀어지는 물결 위에 첫 각인의 원이 쓰는 열린 고리 모양의 압흔이 한 번 생겼다 사라졌다.
그들은 새 귀항로의 다음 좌표를 가져갔다.
우리가 쫓을 틈은 없었다.
검은 물이 기함 뒤에서 거대한 벽처럼 일어났다. 파편이 잃은 출항 방향과 실제 바다가 한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새 길은 모렌으로 열렸지만, 돌아오는 파도가 먼저 함대를 삼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