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1장 · 9화
9화. 아직 타지 않은 화룡
잔영기록자 · 한국어
화룡의 불은 창백했다.
재로 된 몸 안에는 타는 장작도, 녹은 금속도 없었다. 아직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열한 번의 화재가 빛만 빌려 타고 있었다. 그래서 불길은 열을 내지 않았다. 대신 비늘 하나가 펴질 때마다 그 미래에서 겪었어야 할 고통이 몸을 통과했다.
첫 비늘이 열리자 오른손이 타는 감각이 왔다.
두 번째에서는 연기가 폐를 채웠다.
세 번째에서는 무너진 바위가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실제 상처 하나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보지 마!”
라엔이 여섯 관절을 돌렸다. 화룡의 목이 그를 향했다. 창백한 불길이 쏟아졌고, 그는 첫 룬 파편 앞에 지팡이를 세웠다. 불은 지팡이를 태우지 않고 그가 겪어 온 가능성들을 표면에 드러냈다. 수십 개의 작은 손이 지팡이를 붙들었다 놓았다. 라엔이 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잔향이었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각인의 수호 잔향이다.”
“선생님이 만들었습니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의 왼손이 같은 관절을 두 번 돌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잘못 맞물린 압력 때문에 화룡의 등에서 비늘 세 장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바다로 피난한 미래.
낮은 방파제를 세운 미래.
높은 수문을 닫은 미래.
세 장면이 암반실을 겹쳐 덮었다. 발밑에는 전복된 배가, 허리 높이에는 넘치는 파도가, 머리 위에는 폭발 직전의 증기가 나타났다.
나는 리브의 해초 밧줄을 꺼냈다. 흐르는 쪽이 아니라 돌아오는 쪽을 보라는 말을 떠올렸다. 첫 파도 뒤에는 두 번째 파도가 있었고, 한 미래의 해결책은 다음 미래의 원인이 됐다.
밧줄을 세 비늘 사이에 걸었다.
“이어진 결과는 이어진 채로, 같은 순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밧줄의 매듭이 차례로 풀렸다. 전복된 배는 네 번째 비늘로, 낮은 벽은 다섯 번째로, 증기는 여섯 번째로 돌아갔다. 겹쳤던 고통이 나뉘자 숨을 쉴 수 있었다.
화룡이 앞발을 내리쳤다.
라엔이 나를 밀쳐 냈다. 재로 된 발톱이 그의 어깨를 통과했다. 상처 대신 은회색 외투 위에 검은 문장이 나타났다.
「보존을 방해하는 변동 제거.」
화룡은 마을을 태우려는 존재가 아니었다.
열두 번째 미래를 지키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태우는 존재였다.
등 뒤의 비늘 다섯 장이 더 열렸다.
일곱 번째 비늘의 불은 외곽 창고를 태웠다. 빈 점토판들이 나비처럼 날아와 얼굴에 붙었다. 하나가 이마에 닿는 순간 하론이라는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누군가의 공동 화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굵은 웃음과 흑철 집게를 쥔 손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네아가 준 점토판을 꺼냈다.
「나는 줄을 나와 아이를 안았다.」
오늘 처음 생긴 문장을 소리 내 읽자 빈 점토판에 작은 금이 갔다. 하론의 얼굴이 기억으로 돌아왔다. 정해진 기록이 불타도, 방금 서로에게 한 행동은 다른 사람의 증언 속에 남을 수 있었다.
여덟 번째 비늘에서는 화재 잔향이 먼저 타 버렸다. 불을 본 사람들은 도망쳐야 할 방향을 잊었고, 물동이를 든 손은 그것을 어디에 부어야 하는지 몰랐다. 나 역시 화룡 앞에서 배운 모든 호명을 잊었다. 손에는 밧줄과 집게가 남았지만 쓰임이 떠오르지 않았다.
뿌리 수집꾼 하나가 발치의 재에서 몸을 만들었다. 작은 형상은 내 손을 잡아 해초 밧줄 위에 올렸다. 말도 이름도 아닌 반복된 동작이 기억을 돌려줬다. 나는 밧줄의 젖은 결을 따라 물이 돌아올 방향을 다시 읽었다.
아홉 번째 비늘이 열리자 암반실의 모든 불이 라엔에게 몰렸다.
그가 첫 룬 파편의 닻이었기 때문이다. 창백한 불길이 외투와 지팡이, 손가락의 회색 균열을 하나로 이었다. 라엔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불이 모일수록 화룡의 몸은 커졌다.
나는 하론의 흑철 집게를 불길 사이에 세웠다. 집게는 한곳에 불을 붙드는 물건이 아니었다. 화구를 열고 닫아 불이 갈 길을 바꾸는 도구였다. 두 턱을 벌리자 라엔에게 몰리던 불이 암반의 빈 틈들로 나뉘었다.
“닻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놓으면 네게 간다.”
“그럼 제가 다시 보냅니다.”
열 번째 비늘 속에서 하론과 리브가 서로를 지나쳤다. 그 장면이 암반실을 덮자 라엔의 눈에서 나를 알아보는 기색이 사라졌다.
“누구지?”
질문은 차갑기보다 두려웠다.
나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이름을 말하면 화룡이 그 소리를 다시 닻으로 쓸 수 있었다.
“선생님이 여섯 호흡째에 구한 견습입니다.”
“그 견습은 접점을 망쳤다.”
“아닙니다. 세 번째 호흡에 먼저 위험을 알렸습니다.”
수정되기 전의 기억을 말하자 라엔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나를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지운 문장을 기억했다.
열한 번째 비늘이 마지막으로 펴졌다.
종소리가 났다.
화룡은 앞발을 들었고, 라엔은 첫 관절을 돌렸으며, 나는 밧줄을 쥐었다. 다음 종소리에도 같은 동작이 반복됐다. 세 번째 종이 울리기 전에 나는 왼손의 점토판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예정에 없던 소리가 났다.
점토판이 깨지며 주민들의 증언이 조각났다. 나는 그중 하나를 발로 밀어 라엔 앞에 보냈다. 그는 관절 대신 조각을 집었다. 반복이 깨졌다.
화룡의 다섯 비늘에 금이 갔다.
각 실패는 힘으로 이길 적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지키려고 만든 방법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웠다는 사실을 끝까지 함께 보아야 했다.
“이게 선생님이 말한 수호입니까?”
“모두가 사는 길을 지키는 장치다.”
“다른 길을 전부 없애면서요.”
“재난이 지나가면—”
“그 뒤가 없다는 걸 보셨잖아요.”
나는 마레의 청동 관절축을 첫 룬 파편과 여섯 관절 사이에 끼웠다. 완벽하게 닫힌 접점에 작은 틈이 생겼다. 화룡의 가슴에서 열두 번째 비늘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온전한 헤아린이 있었다.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하론은 장작 세 개를 넣었고 리브는 밧줄을 두 번 당겼다. 마레는 매일 같은 지점에 망치를 댔고, 네아는 아무 글자도 없는 점토판을 정리했다.
모형보다 자연스러웠다. 아이는 넘어지기 전에 스스로 균형을 잡았고, 찻잔은 떨어지기 전에 하론의 손이 받아 냈다. 모든 우연이 미리 제거되어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숨을 쉬지 않았다.
가슴은 오르내렸지만 공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파도 소리와 장작 소리, 대화까지 정해진 공명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들은 살아남은 주민이 아니라 생존하는 순간만 보존된 잔향이었다.
작은 나도 그 안에 있었다.
남쪽 접점 앞에서 네 번 숨을 세고 손을 놓았다. 이어 라엔을 바라보며 같은 말을 했다.
화룡의 비늘이 소리를 키웠다.
내 이름의 첫 음절이었다.
훈련 사고의 잔향과 첫날 화덕의 형상이 흉내 냈던 소리. 열두 번째 마을의 나는 그것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왜 제 이름이 여기 있습니까?”
라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답해 주세요.”
“네가 모순된 잔향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첫 각인은 사람의 형상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어. 조건이 달라지면 같은 사람도 다른 잔향으로 갈라졌지. 하나의 정체를 확인할 기준이 필요했다.”
훈련장의 젖은 바닥이 떠올랐다.
내가 여섯 번째 호흡까지 불길을 붙잡았을 때, 라엔은 접점을 끊기 전에 내 손목을 잡았다. 그 접촉을 구조라고만 기억했다.
“그날 제 기억을 가져갔습니까?”
“침식된 오라가 파편과 공명했다. 나는 그 흔적을 보관했다.”
“허락도 없이.”
“그때는 널 살리는 일이 먼저였다.”
“살린 뒤에는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라엔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내 기억을 이용해 열한 미래에서 같은 사람을 찾아냈다. 하론의 세 죽음에 같은 얼굴이 붙고, 리브가 다른 바다에서도 리브로 남은 이유. 나의 이름이 검증의 닻이 되어 사람의 형상을 가능성 사이에 고정했다.
그 닻이 이제 모든 사람을 열두 번째 미래에 묶고 있었다.
화룡이 입을 벌렸다.
이번 불길에는 내 훈련 사고가 들어 있었다. 과거의 내가 중지 신호를 보내고, 라엔이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장면은 곧 수정됐다. 내가 아무 경고 없이 침식되고 라엔이 구해 냈다. 다시 수정됐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모두 웃으며 실습을 마쳤다.
마지막 장면이 가장 달콤했다.
다친 동료도, 흉터도, 죄책감도 없었다.
대신 그 안의 나는 접점을 놓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하론의 흑철 집게를 바닥에 박았다. 현실의 무게가 손에 돌아왔다.
“사고가 없었던 미래는 제 것이 아닙니다.”
화룡의 불길이 흔들렸다.
“상처가 있어야 너라는 뜻은 아니야.”
라엔이 말했다.
“상처만 남기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나는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의 흉터와 떨리는 왼손이 함께 드러났다.
“그날의 경고도, 명령을 따랐던 일도, 끝까지 동료를 놓지 않은 일도 전부 제 기억입니다. 하나만 지워서 완벽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화룡의 비늘들이 일제히 내 이름을 부르려 했다.
첫 음절이 암반실을 가득 채웠다. 그 뒤를 각인이 정한 소리로 완성하면 나는 검증의 닻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물고 본명을 안으로 불렀다.
소리는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이름은 파편의 증거도, 기록원의 소유물도 아니었다. 내가 지나온 기억을 내가 이어 부르는 가장 짧은 서약이었다.
그 위에 새로운 맹세를 세웠다.
“나는 아직 하지 않은 행동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화룡이 울부짖었다.
열두 번째 비늘에 금이 갔다. 보존된 마을 속 작은 내가 네 번째 호흡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정해진 장면과 다른 행동이었다. 작은 나는 남쪽 접점에서 일어나 넘어진 아이에게 걸어갔다.
한 사람의 반복이 깨지자 다른 주민들도 멈췄다.
하론이 네 번째 장작을 들었다. 리브가 밧줄을 한 번만 당겼다. 마레는 망치를 내려놓았고, 네아는 빈 점토판에 첫 문장을 새겼다.
완벽한 마을이 무너졌다.
라엔이 비틀거리며 첫 룬 파편을 붙잡았다.
“다시 고정해야 해.”
“그만 놓으세요.”
“그러면 재난이 풀려난다.”
“사람들이 지상에서 막고 있습니다.”
“모두는 못 막아.”
“선생님 혼자서도 못 막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관절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더듬었다. 방금 어느 쪽을 돌렸는지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라엔.”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나를 뿌리치려 했다. 힘은 남아 있었지만 방향이 없었다.
“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의 입술이 내 본명의 첫 음절을 만들었다.
나는 손에 힘을 줬다.
“그 이름을 각인에서 읽지 말고, 저를 보고 기억하세요.”
라엔의 눈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독자에게도, 파편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부름은 반복이 아니었다. 떨렸고, 중간에 숨이 걸렸으며, 미안함 때문에 끝이 흐려졌다.
내 왼손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라엔은 처음으로 열두 번째 비늘을 제대로 바라봤다. 숨 쉬지 않는 주민들, 같은 미소, 정해진 대답.
“나는…… 살아 있게 한 줄 알았다.”
“보존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살아가게 한 건 아닙니다.”
화룡이 몸을 비틀었다.
열두 번째 비늘이 완전히 갈라지면서 나머지 열한 비늘도 몸에서 떨어졌다. 나는 뿌리를 불러 각각의 비늘을 감쌌다. 첫 미래는 첫 나이테로, 두 번째는 두 번째 나이테로 돌아갔다.
화룡을 없애지 않았다.
각 실패가 다른 실패와 섞이지 않도록 돌려보냈다.
재로 된 등뼈가 무너졌다. 창백한 불은 색을 되찾아 붉어졌고, 물먹은 비늘은 푸른 흐름이 됐다. 뿌리들은 갈색 흙을 품고 암반 틈으로 뻗었다.
라엔이 첫 룬 파편에서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암반실의 모든 봉인이 풀렸다.
지하 불씨가 현실의 열을 되찾았다. 천장 위의 바다가 무게를 되찾았다. 수림이 나눠 붙들고 있던 열한 미래의 잔해도 한꺼번에 땅 위로 밀려났다.
굉음과 함께 암반이 갈라졌다.
불은 공동 화덕을 향해 올라갔다.
물은 무너진 방파제 틈으로 쏟아졌다.
뿌리는 마을의 세 방향에서 동시에 솟았다.
완벽한 미래는 깨졌다.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불완전한 현재를 건너야 했다.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조차 다음 동작을 미리 정해 주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라엔의 팔을 어깨에 걸고 무너지는 암반실의 출구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