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1장 · 8화
8화. 열두 번째 밤
잔영기록자 · 한국어
열두 번째 밤은 엿새를 건너뛰어 왔다.
조사실을 가로막은 물벽 너머로 해가 여섯 번 지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실제 시간은 한 호흡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열두 번째 모형의 하늘은 황혼과 밤, 새벽을 빠르게 반복했다. 마지막 밤이 닫히자 모형 속 바다와 공동 화덕이 동시에 솟았다.
현실의 조사실도 흔들렸다.
천장에서 바닷물이 쏟아지고 바닥 틈에서는 불길이 올라왔다. 라엔의 각인이 아직 오지 않은 재난의 조건을 현재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시간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땅이 열두 번째 날에 도달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벽에서 물러나!”
마레가 나를 잡아당겼다. 투명한 벽 안에서 불과 물이 부딪치며 흰 증기가 폭발했다. 충격이 조사실 탁자들을 뒤집었다. 열두 마을 모형이 바닥으로 쏟아졌고, 작은 지붕과 청동 조각들이 물길을 따라 흘렀다.
라엔은 건너편에서 첫 룬 파편을 붙잡고 있었다.
“선생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입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증기 너머로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 끝부터 회색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파편의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오라를 접점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네아가 금속 집게를 물벽에 댔다가 곧 떼었다.
“이건 벽이 아니에요. 같은 순간을 계속 되돌려 세운 겁니다.”
물은 올라가고, 불은 증기를 만들고, 증기는 식어 다시 물이 되었다. 같은 충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됐다.
“반복에 없는 일을 넣어야 합니다.”
나는 바닥을 기는 뿌리를 잡았다. 물벽은 불과 물만으로 닫혀 있었다. 수림의 방향은 열두 번째 모형에 없었다.
“마레, 벽이 무너질 때 받쳐 주세요.”
“무엇으로요?”
“열한 번째까지 실패한 것들로.”
마레는 흩어진 모형의 기둥과 청동 조각을 모아 벽 앞에 쌓았다. 하론이 흑철 집게를 틈에 박았고, 리브가 수피로 감싼 손으로 해초 밧줄을 묶었다. 네아는 검은 퇴비를 접점마다 눌러 담았다.
나는 뿌리를 세 재료 사이로 통과시켰다.
“끝난 미래를 먹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연다.”
뿌리에서 새잎이 터졌다.
물벽의 반복에 처음으로 녹색 그림자가 들어갔다. 똑같이 솟던 물이 잎을 피해 갈라졌고, 불길은 젖은 수피를 만나 한 박자 늦었다. 어긋남은 작은 틈이 되었다.
마레가 망치를 내리쳤다.
물벽이 무너졌다.
나는 라엔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지팡이를 휘둘러 바닥의 수문을 닫았다. 첫 룬 파편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돌판 위에 서 있었다.
“지상부터 구해.”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멈추면 됩니다.”
“각인을 놓으면 열한 미래의 재난이 동시에 풀려난다.”
“이미 풀리고 있습니다.”
“아직은 내가 순서를 붙들고 있어.”
그의 손가락이 한 번 잘못 움직였다가 같은 관절을 다시 잡았다. 침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라엔!”
네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 동작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판이 내려갔다. 닫히는 틈 사이로 라엔의 얼굴이 보였다.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정한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지상에서 비명이 들렸다.
우리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공동 화덕의 굴뚝은 하얗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하 불씨가 암반 틈을 타고 솟으면서 모든 화구에서 검은 불이 뿜어져 나왔다. 해안에는 존재하지 않던 높은 방파제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 수문이 닫히자 밀물이 벽 안에 갇혔고, 마을 수로의 물이 지붕 높이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을 막으면 물이 갇히고, 물을 빼면 불이 번졌다.
열한 실패의 조건이 한꺼번에 현실이 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주민들이었다.
종이 울리자 모두 집에서 나왔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해진 줄을 만들고, 정해진 짐을 들고, 같은 간격으로 내륙길을 향했다.
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앞사람도 뒷사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달려가 아이를 일으켰다. 아이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원래 줄의 빈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이쪽으로 가면 길이 무너져!”
주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하론이 행렬 앞에 섰다.
“화덕이 꺼졌다!”
그 한마디에 몇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정해진 피난 역할보다 오래된 습관이 먼저 반응했다. 하론은 거짓말한 것이 미안한 듯 화덕을 한번 봤지만 계속 외쳤다.
“돌아오는 배가 길을 잃는다! 불을 살릴 사람은 나를 따라와!”
주민 셋이 줄에서 이탈했다.
반복이 흔들렸다.
리브가 해초 밧줄을 들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해안으로! 오늘은 내륙길 안 씁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줄에서 빠져나왔다. 누군가는 왜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아이부터 옮기자고 말했다. 질문과 다툼이 생길수록 완벽한 피난 순서는 무너졌다.
살아 있는 혼란이 돌아오고 있었다.
마레는 자신이 쌓은 임시 방조벽 앞에 섰다. 흙자루와 나무 기둥은 이제 미래 방파제의 기초에 붙어 물의 출구를 막고 있었다.
“저걸 부숴야 합니다.”
“안쪽 물이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수문을 닫아 두면 화덕이 먼저 폭발해요. 제가 만든 길이니 제가 엽니다.”
마레는 일꾼들에게 중앙 기둥의 밧줄을 끊으라고 했다. 사람들은 망설였다. 며칠 동안 바다를 막으려고 세운 것을 스스로 무너뜨려야 했다.
그녀가 먼저 망치를 들었다.
첫 타격에 나무가 갈라졌다.
두 번째 순간, 미래 방파제에서 청동 지지대가 튕겨 나왔다. 마레는 피하지 않고 망치를 세워 받았다. 충격에 오른쪽 어깨가 뒤로 꺾였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마레!”
“팔 하나는 남았습니다.”
마레는 왼손으로 망치를 주워 일어났다.
“제가 세우자고 했습니다. 부수는 것도 제가 먼저 해야죠.”
일꾼들이 움직였다. 밧줄이 끊어지고 흙자루가 수로 쪽으로 밀려났다. 중앙 기둥이 넘어가며 미래 방파제의 관절 하나를 함께 뜯었다.
좁은 틈으로 물이 바다 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네아는 피난 종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주민들의 반복을 침묵으로 덮지 않았다. 대신 빈 점토판을 수십 장 펼쳤다.
“지금 하는 일을 말하세요!”
그녀가 외쳤다.
“정해진 역할이 아니라, 방금 스스로 한 일을!”
아이를 일으킨 여성이 먼저 말했다.
“나는 줄을 나와 아이를 안았다.”
네아가 그대로 기록했다.
“나는 화덕 불을 확인하러 간다.”
“나는 마레가 다친 걸 보고 밧줄을 잡았다.”
“나는 무서워서 도망쳤다가 돌아왔다.”
새로운 문장이 생길 때마다 주민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네아는 지워야 할 반복 대신 남겨야 할 증언을 모았다.
하론은 공동 화덕으로 들어갔다. 천장의 돌이 붉게 달아올라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흑철 집게로 가장 깊은 화구의 덮개를 잡았다.
“저걸 열면 불이 쏟아집니다!”
“닫아 두면 마을 아래서 터져.”
그는 두 손으로 집게를 비틀었다.
덮개가 열리자 검은 불기둥이 솟았다. 하론은 몸을 낮추고 옆 배기구의 문을 발로 찼다. 불길이 굴뚝이 아니라 비어 있는 동쪽 광장으로 꺾였다. 주민들이 물동이와 젖은 천을 들고 새 길을 만들었다.
리브는 해안 수로와 피난선을 연결했다. 왼손의 수피 붕대가 물을 먹고 부풀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그는 첫 배를 내륙길 대신 방파제의 열린 틈으로 보냈다.
“두 번째 밀물이 옵니다!”
그가 파도의 색을 보고 외쳤다.
“한 번 나간 배는 북쪽 절벽을 돌아 다시 들어와요. 두 번 길을 써야 모두 옮길 수 있습니다!”
각자의 일이 생겼다.
마레는 벽을 부수고, 네아는 증언을 기록했다. 하론은 불의 출구를 열고 리브는 물 위의 길을 만들었다. 열두 번째 각인이 정해 둔 역할과 달랐다.
일은 매끄럽게 맞지 않았다.
마레가 연 수로로 불붙은 기름이 흘러들었다. 리브의 첫 피난선은 물길을 바꾸느라 출발이 늦었다. 하론이 만든 동쪽 화로 때문에 광장의 물동이 절반이 바닥났다. 주민들은 서로 고함을 쳤고, 방금 정한 순서를 다시 바꿨다.
“피난선에 물동이를 실어!”
“그러면 사람이 덜 타잖아!”
“아이와 노인은 두 번째 배로 옮긴다. 첫 배가 수로를 열어야 해!”
“내륙길의 바위부터 치우면 되지 않나?”
누구도 완전한 답을 갖지 못했다. 한 사람이 낸 방법은 다른 곳에 문제를 만들었고, 그 문제를 본 사람이 새로운 방법을 보탰다. 열두 번째 모형에서는 생기지 않았던 실수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런데도 넘어진 아이는 다시 일으켜졌고, 비어 버린 물동이는 다른 집의 항아리로 채워졌다. 어깨를 다친 마레가 망치를 놓치자 이름도 모르는 어부가 그것을 주워 기둥을 마저 부쉈다. 하론은 자기 화덕을 지키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있는 방향에 맞춰 불의 출구를 다시 틀었다.
완벽한 순서가 없어서 누구나 다음 행동을 만들 수 있었다.
그때 종이 또 울렸다.
주민들의 몸이 잠시 굳었다. 아이를 안은 여성은 줄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했고, 망치를 든 어부는 손에 든 도구를 떨어뜨렸다. 각인이 흐트러진 역할을 다시 불러 모으고 있었다.
네아가 점토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소리 내어 읽으세요!”
사람들이 방금 남긴 증언을 외쳤다.
“나는 줄을 나왔다!”
“나는 남의 망치를 주웠다!”
“나는 형을 따라가지 않고 배를 묶었다!”
문장들은 아름답지도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두 열두 번째 미래에는 없는 말이었다. 종의 박자가 흐트러졌다. 주민들이 다시 움직였다.
나도 점토판 하나를 집었다.
빈 면에 뼈필을 눌렀다.
「나는 라엔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지하로 간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혼자 붙든 미래를 함께 놓기 위해서.」
문장이 너무 길어 마지막 글자는 비뚤어졌다. 고쳐 쓰지 않았다. 완벽한 보고서에 없는 기록이면 충분했다.
내가 할 일도 분명해졌다.
라엔이 내려간 첫 룬 파편에 도달해야 했다.
“지하로 가는 길은 조사실뿐입니다.”
내 말에 하론이 열린 화구 아래를 가리켰다.
“뿌리가 올라온 길이 하나 더 있어.”
검은 불기둥 뒤로 굵은 뿌리가 보였다. 수림은 타면서도 안쪽에 새 수피를 만들고 있었다. 뿌리 수집꾼들이 줄을 지어 지하로 내려가며 불탄 재와 청동 조각을 옮겼다.
네아가 내 곁으로 왔다.
“라엔은 첫 룬 파편을 가장 오래된 암반에 박았을 겁니다. 화덕과 해안의 압력이 둘 다 닿는 곳.”
“수중 점검실 아래군요.”
“혼자 갈 생각은 아니겠죠?”
마레가 다친 팔을 몸에 묶은 채 다가왔다.
나는 지상의 사람들을 보았다. 방파제는 아직 절반만 열렸고, 두 번째 밀물은 수평선 위로 검은 선을 만들고 있었다. 공동 화덕의 불도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여기는 여러분이 맡아야 합니다.”
“라엔을 혼자 상대하겠다는 겁니까?”
“싸우러 가는 게 아닙니다. 각인을 풀러 갑니다.”
“그 사람이 순순히 비켜 줄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론이 흑철 집게를 건넸다. 손잡이는 뜨거웠지만 잡을 수 있을 만큼 식어 있었다.
“불은 출구를 열어 두면 내가 맡을 수 있어. 밑에서 닫히는 문이 있으면 이걸 써.”
리브는 해초 밧줄 한 타래를 주었다.
“물이 두 번 같은 곳으로 온다고 같은 물은 아닙니다. 길 잃으면 흐르는 쪽 말고 돌아오는 쪽을 보세요.”
마레는 부러진 청동 관절축을 내 주머니에 넣었다.
“완벽하게 맞는 부품은 잘못 끼우면 절대 안 빠집니다. 틈을 만드는 데 쓰세요.”
네아는 기록한 점토판 하나를 건넸다. 첫 문장은 아이를 안은 여성의 증언이었다.
“반복이 이름을 부르면, 오늘 새로 생긴 문장을 읽어요.”
나는 네 물건을 챙겨 뿌리 길로 들어갔다.
불탄 수피 아래는 서늘했다. 뿌리 수집꾼들이 앞서며 잎을 한 장씩 떨어뜨렸다. 그 잎을 따라 공동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길 끝에는 넓은 암반실이 있었다.
첫 룬 파편은 중앙의 검은 돌기둥에 박혀 있었다. 여섯 관절이 파편을 둘러싸고 불과 물, 뿌리의 압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라엔은 기둥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관절을 하나씩 조정했다.
그와 나 사이에 재가 쌓였다.
처음에는 발목 높이였다. 곧 허리까지 솟더니 거대한 등뼈 모양으로 굳었다. 열한 미래에서 아직 태우지 못한 기억들이 불을 얻고 있었다. 재로 된 갈비뼈가 펴지고, 긴 목이 암반 천장까지 올라갔다.
날개 없는 용이 몸을 일으켰다.
그 비늘마다 서로 다른 헤아린이 불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현실에서 타지 않은 화룡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