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1장 · 6화
6화. 폐허 아래의 봄
잔영기록자 · 한국어
마을 아래에는 봄이 열한 번 와 있었다.
공동 화덕 바닥에 열린 틈은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 양옆의 암반은 불에 그을려 검었지만, 틈 사이마다 새잎이 돋아 있었다. 한쪽에는 막 피어난 연둣빛 잎이, 바로 옆에는 여름의 짙은 잎과 가을빛 마른 잎이 같은 줄기에서 자랐다. 뿌리 아래에는 녹지 않은 서리가 붙어 있었다.
서로 다른 계절이 한 뼘 안에 겹쳐 있었다.
“하론!”
마레가 입구에 대고 외쳤다. 대답은 없었다.
나는 떨어진 흑철 집게를 들었다. 손잡이를 감싼 뿌리는 이미 풀렸지만, 수피의 결이 지하를 향해 눕혀져 있었다.
“이쪽으로 데려간 게 맞습니다.”
“데려간 것이 아니라 삼킨 거겠지.”
라엔이 지팡이 끝으로 뿌리 하나를 눌렀다. 연둣빛 잎이 닿기 전에 오므라들었다.
“수림의 오라는 남은 것을 분해해 자기 성장에 쓴다. 화염과 해류 잔향을 너무 많이 먹었다면 사람과 기억도 구분하지 못할 수 있어.”
네아가 계단 벽을 살폈다.
“구분하지 못했다면 집게와 갈대끈을 입구에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먹이를 끌고 가며 흔적을 남기는 식물도 있어.”
“그럼 내려가서 어느 쪽인지 보면 되겠네요.”
마레는 벌써 허리에 측량 밧줄을 묶고 있었다. 그녀가 첫 계단에 발을 올리자 돌 가장자리가 부서졌다. 계단 아래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색 빛이 아니라, 수천 장의 잎이 서로 스치는 희미한 반사가 올라왔다.
“내가 앞장선다.”
라엔이 마레를 지나쳤다.
그는 평소보다 빠르게 내려갔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의 걸음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단은 공동 화덕보다 훨씬 오래된 구조였다. 벽에는 글자나 그림이 없었고, 크기가 다른 돌들이 뿌리의 굵기에 맞춰 끼워져 있었다. 어떤 돌은 뿌리가 자라며 밀어 낼 자리를 미리 남겨 둔 듯 곡선으로 파여 있었다.
바닥에 닿자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폐허가 가득했다.
무너진 지붕과 부러진 배의 돛대, 녹아붙은 화덕 솥, 청동 방파제 조각. 모두 헤아린에서 본 것과 닮았지만 현재의 마을에는 없는 물건들이었다. 지붕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높은 경사를 가졌고, 돛대에는 리브가 설명한 적 없는 피난 표식이 묶여 있었다. 솥의 바닥에는 사용한 지 수십 년은 된 듯한 숯 자국이 겹겹이 남았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이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를 작은 형상들이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아이들인 줄 알았다. 허리 높이의 몸과 가느다란 팔, 짐을 안고 종종걸음 치는 모습 때문이었다. 가까이 오자 얼굴 대신 둥근 씨앗 껍질이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팔과 다리는 잔뿌리가 꼬여 만들어졌고, 등에는 마른 잎이 포개져 있었다.
형상 하나가 녹은 청동 못을 주워 가슴에 넣었다. 다른 하나는 재를 두 손으로 모아 씨앗 껍질 안에 부었다. 세 번째는 깨진 점토판을 등에 지고 굵은 뿌리 쪽으로 옮겼다.
“뿌리 수집꾼.” 네아가 속삭였다. “죽은 숲에서 가끔 생겨요. 썩지 못한 것을 모아 땅으로 돌려보내는 잔향입니다.”
“저것들이 두 사람을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흑철 집게를 내밀자 가장 가까운 형상이 멈췄다. 씨앗 껍질이 하론의 물건을 향해 기울었다. 이어 공동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마레가 따라가려는 순간 라엔이 막았다.
“유인이다.”
“하론의 물건을 알아봤습니다.”
“먹은 기억을 흉내 낸 걸 수도 있어.”
라엔은 주머니에서 숯 조각을 꺼내 형상 앞에 던졌다. 뿌리 수집꾼은 숯을 집지 않았다. 대신 숯 주변의 검은 재만 조심스럽게 긁어 모았다. 타지 않은 숯은 그대로 남겼다.
네아가 말했다.
“살아 있는 것과 끝난 것을 구분하네요.”
라엔의 턱이 굳었다.
그때 지상에서 피난 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레가 위를 올려다봤다.
“해안 신호입니다.”
“방파제 잔향이 다시 나타난 것 같군.”
라엔은 즉시 몸을 돌렸다.
“나는 올라가 봉인을 유지하겠다. 너희도 두 사람의 위치만 확인하고 곧 돌아와.”
“선생님.”
그는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곳을 아십니까?”
“처음 본다.”
“그런데 왜 입구가 열리자마자 오염이라고 단정하셨죠?”
“사람 둘을 끌고 간 뿌리를 달리 부를 말이 있나?”
“아직 끌고 갔는지 보호한 건지 모릅니다.”
“그 차이를 확인하는 동안 지상의 주민들이 위험해질 수 있어.”
논리는 옳았다. 방파제 공사와 공동 화덕 모두 사람 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가 서둘러 떠나는 이유가 지상의 위험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라엔은 끝내 나를 보지 않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장 굵은 뿌리에는 손대지 마라.”
그는 계단 위로 사라졌다.
피난 종은 곧 멈췄다.
마레가 낮게 욕설을 했다.
“저 사람은 모르는 곳에서도 길을 잘 찾네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라엔이 지나간 바닥에는 지팡이 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있었다. 망설임 없이 공동의 가장 안전한 부분만 밟은 흔적이었다.
뿌리 수집꾼이 다시 우리를 불렀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마른 잎으로 된 등을 펴고 두 번 손짓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폐허는 안쪽으로 갈수록 이상해졌다. 같은 장소가 여러 방식으로 무너져 있었다. 공동 화덕의 동쪽 벽이 붕괴한 잔해 옆에는 서쪽 배기구가 막힌 또 하나의 화덕이 있었다. 낮은 방파제 위로 파도가 넘은 흔적과 높은 방파제 안쪽이 폭발한 흔적이 나란히 놓였다.
한 번의 재난이 남긴 폐허가 아니었다.
굵은 뿌리들은 잔해 하나마다 깊이 박혀 있었다. 재를 빨아들인 뿌리는 붉은 갈색이었고, 물먹은 청동에 닿은 뿌리는 푸른빛을 띠었다. 점토판을 감싼 뿌리에서는 잘린 말소리 같은 바스락거림이 났다.
그 뿌리들이 모이는 곳에 거대한 나무줄기가 있었다.
줄기는 땅에서 위로 자라지 않았다. 천장과 바닥, 폐허 사이 모든 방향으로 뻗어 중심을 가늠할 수 없었다. 잘린 단면 하나가 사람 키만 했고, 나이테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나는 손으로 고리들을 세었다.
하나부터 열하나.
그 바깥에는 새로 생기기 시작한 얇은 선이 있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열두 번째 고리였다.
“나무가 열한 살이라는 뜻은 아니겠죠?”
마레가 물었다.
“계절이 열한 번 겹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네아는 나이테 사이에 금속 집게를 넣었다. 각 고리에서 다른 냄새가 났다. 탄 기름, 갇힌 연기, 젖은 돌, 바닷물, 뜨거운 증기. 우리가 본 세 죽음과 방파제 잔향의 냄새였다.
“이 나무는 폐허를 만든 게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폐허가 생길 때마다 한 겹씩 먹었습니다.”
멀리서 리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소리는 굵은 뿌리 너머에서 났다.
마레가 망치를 들고 달려갔다. 폐허의 벽 하나를 돌아서자 뿌리로 된 커다란 구가 보였다. 사람 둘을 감쌀 만큼 컸다. 안쪽에서 하론의 신음이 들렸다.
“살아 있어요!”
마레가 뿌리에 망치 끝을 걸었다.
뿌리 수집꾼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작은 형상들이 우리 앞을 막았고, 바닥의 잔뿌리가 발목을 감쌌다. 마레가 첫 줄기를 끊자 녹색이 아니라 검은 재가 터져 나왔다. 공동 전체가 흔들렸다.
굵은 뿌리들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나는 흑철 집게로 하나를 막았다. 충격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울렸다. 뿌리는 집게를 휘감아 빼앗으려 했다.
“불로 지져야 합니까?”
“그러면 안의 두 사람도 탑니다!”
네아가 집게로 잔뿌리를 끊어 내며 외쳤다.
마레는 뿌리 구의 표면을 두드렸다.
“빈 곳을 찾겠습니다. 두 사람과 떨어진 지점만 열면 돼요.”
나는 뿌리 수집꾼 하나를 밀쳐 냈다. 형상은 쓰러지면서도 팔로 바닥의 청동 파편을 감쌌다. 공격당한 자신보다 파편을 먼저 보호했다.
다른 수집꾼도 같았다. 네아의 집게가 휘둘러지자 몸을 피하지 않고 점토판 앞을 막았다. 천장에서 내려온 굵은 뿌리는 우리를 때린 뒤 그대로 휘두르지 않았다. 폐허와 우리 사이에 벽처럼 자리 잡았다.
반복되는 동작.
때리는 것이 아니라 밀어 내고, 감싸고, 가로막는다.
“멈추세요!”
내가 외쳤다.
마레의 망치가 뿌리 표면 앞에서 멎었다.
“이것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내 발목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까?”
잔뿌리가 그녀의 장화를 무릎까지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가시는 살을 향하지 않고 바깥으로 서 있었다. 무언가 날아올 때 충격을 대신 받을 모양이었다.
“우리가 폐허를 건드릴 때만 움직입니다. 두 사람을 가둔 게 아니라 바깥의 잔향에서 보호하는 겁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공동 저편에서 굉음이 났다.
높은 방파제의 잔해가 투명한 물결로 바뀌어 우리 쪽으로 무너져 왔다. 동시에 화덕 폐허에서는 불길이 솟았다. 열과 물이 뿌리 구를 향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밀려왔다.
뿌리들이 우리를 감싼 이유를 알았다.
나는 마레의 장화를 붙든 잔뿌리에 손을 댔다.
“놓아 줘.”
명령하듯 부르자 뿌리가 더 조여 왔다. 식물의 오라는 불이나 물과 달랐다. 한순간의 방향보다 이어지는 관계를 붙잡았다. 어떤 흙에서 시작했고, 무엇을 감았으며, 어디에 새순을 내놓을지. 하나를 자르면 끝나는 길이 아니라 상처 주변으로 다시 자라는 길이었다.
나는 호명을 바꿨다.
“우리가 함께 막는다.”
마레의 발목을 감싼 뿌리가 천천히 풀렸다.
그녀는 내 뜻을 알아듣고 측량 밧줄을 폐허의 기둥 사이에 걸었다. 네아는 검은 퇴비를 불길 앞에 뿌렸다. 나는 굵은 뿌리의 끝을 밧줄과 연결했다.
첫 충격은 물이었다.
방파제 잔향이 공동을 덮쳤다. 뿌리들이 물을 정면으로 막지 않고 몸속의 빈 관으로 흘렸다. 푸른빛을 띤 줄기들이 부풀었다. 마레의 밧줄은 옆 폐허로 힘을 나눴다.
두 번째 충격은 불이었다.
네아의 퇴비 위로 불길이 지나가며 열을 잃었다. 뿌리는 타는 대신 마른 껍질 한 겹을 벗었다. 껍질 아래에서 새순이 돋았다.
뿌리 수집꾼들이 잔해 사이를 뛰어다녔다. 물먹은 재와 뜨거운 청동을 한 조각씩 주워 큰 나무의 열한 나이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로 충돌하던 잔향이 나이테마다 나뉘어 가라앉았다.
공동이 고요해졌다.
뿌리 구가 스스로 열렸다.
하론은 리브를 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의식이 있었다. 하론의 외투는 그을렸지만 피부에는 상처가 없었다. 리브의 왼손을 감았던 갈대끈은 풀려 있었고, 대신 얇은 수피가 상처 주위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형이 오염이라던데.”
리브가 힘없이 웃었다.
“누가?”
“뿌리가. 형은 불이 몰려오는 쪽으로 자꾸 뛰어가니까.”
하론이 동생의 머리를 밀었다.
“입은 멀쩡한 모양이군.”
그는 일어나려다 뿌리 구 안쪽을 보았다. 수피에는 하론의 형상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불에 타 죽은 하론, 연기에 질식한 하론, 길에 깔린 하론. 그 사이에는 살아남아 리브를 끌어내는 하론과 주민들을 화덕 밖으로 보내는 하론도 있었다.
“왜 나를 죽는 모습만 보여 줬지?”
그가 물었다.
나는 수피의 형상들을 살폈다.
“뿌리는 죽음만 모은 게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남은 흔적도 있습니다.”
“그럼 내가 원인이 아닌가?”
“여러 미래마다 하론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화덕을 지키고, 사람들을 내보내고, 리브를 살리려 했어요. 그 때문에 가장 많은 흔적이 남은 겁니다.”
하론은 오랫동안 자기 형상들을 바라봤다.
“모두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지.”
“저도 그 얼굴부터 봤습니다.”
“나도 그랬어.”
그는 살아남은 형상 하나를 손끝으로 짚었다.
“죽는 모습은 눈에 잘 띄고, 사는 건 그 뒤에 숨어 있었군.”
리브가 형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뒤도 좀 봐.”
하론이 이번에는 웃었다. 짧지만 힘이 있는 웃음이었다.
뿌리 수집꾼들이 우리 주위에 모였다. 그중 하나가 하론의 흑철 집게를 받아 들고 공동 깊숙한 곳으로 걸었다. 집게를 돌려받으려 하자 형상은 뿌리 사이의 좁은 틈을 가리켰다.
가장 굵은 뿌리가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라엔이 손대지 말라고 한 뿌리였다.
우리는 두 사람을 부축해 틈 안으로 들어갔다. 길 끝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과 다른 매끈한 벽이 나타났다. 잔향기록원의 조사실에서 쓰는 방수 점토로 마감된 벽이었다.
벽 가운데에는 열린 고리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라엔의 표식이었다.
문 옆 선반에는 그가 쓰는 것과 같은 검은 밀랍, 여섯 관절 도구의 예비 뼈막대, 잔향기록원의 봉인 끈이 놓여 있었다. 먼지가 없었다. 최근까지 누군가 드나든 곳이었다.
뿌리 수집꾼은 흑철 집게를 문틈에 끼웠다.
안에서 열한 개의 작은 종이 차례로 울렸다.
나이테의 수와 같았다.
네아가 문에 귀를 댔다.
“두 번째 공명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마레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제 열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라엔이 남긴 마지막 지시를 떠올렸다.
가장 굵은 뿌리에는 손대지 마라.
뿌리는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폐허를 먹고 사람을 보호했으며, 라엔이 봉인한 문 앞에 멈췄다.
“문만 엽니다.”
마레의 망치가 열린 고리 한가운데를 내리쳤다.
표식이 둘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