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룬1장

3화. 존재하지 않는 방파제

길은 하루에 두 번 바다 밖으로 나왔다.

썰물이 시작되자 리브는 장화를 벗어 등에 묶었다. 맨발로 물속을 걷던 그는 모래 아래 묻힌 돌을 발가락으로 찾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잔잔한 갯벌뿐이었지만, 리브는 몇 걸음마다 방향을 바꾸며 좁은 길 위에 정확히 발을 올렸다.

“내가 밟은 곳만 따라오세요.”

“어제는 여기까지 물이 빠지지 않았습니까?”

내 질문에 리브가 고개를 저었다.

“길이 먼저 나온 겁니다. 물은 나중에 물러났고요.”

라엔이 뒤에서 낮게 물었다.

“순서가 바뀌었다는 뜻인가?”

“말 그대로예요. 파도가 길을 피해 갔습니다.”

나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얕은 물은 발목을 향해 밀려오다가 오래된 포석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돌 사이에는 따개비가 붙어 있었으나 껍데기가 모두 안쪽을 향했다. 바닷물이 길 위에서 바다 쪽으로 흘렀다는 흔적이었다.

바람을 거스르던 재와 같았다.

오라는 힘의 크기보다 방향으로 먼저 드러난다. 불은 태우기 전에 무엇을 향할지 정하고, 물은 밀려오기 전에 어느 틈으로 흐를지 정한다. 헤아린에서는 그 방향들이 하나씩 뒤집히고 있었다.

우리가 옛길의 절반쯤 왔을 때, 바다 쪽 안개에서 망치 소리가 들렸다.

쨍.

두 번 쉬고 다시 쨍.

리브가 걸음을 멈췄다.

“어제는 없던 소리입니다.”

“사람이 있는 것 같군.”

라엔이 앞서려 하자 리브가 팔을 내밀었다.

“여기부터 길이 끊깁니다.”

포석은 정말로 발 세 걸음 앞에서 끝났다. 그 너머는 허리 높이까지 꺼진 수로였다. 물이 맑아 바닥이 보였지만, 깊이를 믿을 수 없었다. 수면 아래의 돌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다가 시선을 옮기면 멀어졌다.

망치 소리가 다시 났다.

안개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짧게 자른 머리, 소금 얼룩이 밴 작업복, 허리에 찬 여러 크기의 측량추. 그는 우리를 보자 망치를 든 손을 내렸다.

“잔향기록원?”

라엔의 표식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재건 연맹의 마레 기사입니까?”

“기사까지 붙이면 내가 멀쩡한 설계도만 보는 사람 같잖습니까. 마레면 됩니다.”

마레는 리브와도 아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짧게 고개를 맞댔다. 리브가 청동 조각 이야기를 꺼내자 마레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걸 아직 가지고 있어?”

나는 천에 싸 둔 조각을 건넸다. 마레는 소매로 물기를 닦고 홈 사이에 손톱을 넣었다. 이어 허리춤에서 금속 자를 꺼내 폭과 두께를 쟀다.

“방파제 연결쇠입니다.”

“헤아린 방파제에는 청동 연결쇠가 없다.” 라엔이 말했다.

“잘 아시네요. 지금 건 돌을 맞물리고 해초 밧줄로 충격을 빼니까요.”

마레는 조각을 햇빛에 비췄다.

“이건 제가 지난달 연맹에 올린 새 설계에 들어가는 물건입니다. 지지대를 돌리는 관절부예요. 파도를 정면으로 받지 않고 옆 수로로 흘리려고 만들었죠.”

“이미 제작했습니까?”

“시제품도 못 만들었습니다. 청동 배합부터 반려됐으니까.”

“설계가 유출됐을 가능성은?”

마레가 헛웃음을 쳤다.

“유출해서 뭘 합니까?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퇴짜 맞은 실패작인데.”

그는 조각의 세 줄 압력 자국을 가리켰다.

“더 이상한 건 이쪽입니다. 이 마모는 적어도 십 년은 파도를 받아야 생깁니다. 그것도 제가 계산한 각도로 설치됐을 때만.”

나는 청동 조각을 다시 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설계가 이미 제작되어 십 년 동안 바다를 견딘 흔적. 어제의 불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장례를 보여 주었다. 오늘의 바다는 아직 세워지지 않은 벽의 잔해를 밀어 올렸다.

“벽을 보셨습니까?”

“그래서 새벽부터 이러고 있죠.”

마레가 안개 쪽을 향해 망치를 들었다. 그가 두드린 것은 허공이 아니었다. 안개 사이로 물에 젖은 청동빛 선이 잠깐 드러났다. 파도가 들어오자 선은 높아져 거대한 벽의 모서리가 되었다. 파도가 물러나자 다시 투명해졌다.

나는 숨을 잊었다.

벽은 헤아린 앞바다를 가로질러 양쪽 절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의 낮은 돌 방파제보다 세 배는 높았다. 수백 개의 청동 관절이 비늘처럼 겹쳐 있었고, 그 사이로 물이 가느다란 폭포가 되어 흘렀다. 벽 너머에는 현재의 마을과 다른 지붕들이 보였다. 더 높고, 서로 가까웠으며, 화덕의 굴뚝은 두 개였다.

파도 한 번이 지나가는 동안만 존재하는 해안이었다.

“잔향입니까?” 리브가 물었다.

“그렇게 보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마레가 망치로 투명한 벽을 다시 두드렸다. 금속음이 울렸고 손잡이가 튕겨 나왔다.

“보이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의 손바닥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실재하지 않는 벽이 충격을 돌려준 것이다.

라엔은 안개 앞에 쪼그려 앉아 작은 조사 도구를 펼쳤다. 납작한 나무판에 구리 관절 여섯 개가 박혀 있고, 각 관절은 가느다란 뼈막대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뼈막대 하나를 빼서 다른 홈에 끼웠다. 관절들의 압력이 바뀌자 안개 속 벽이 조금 선명해졌다.

“반사 잔향이군.” 그가 말했다. “물이 간직한 형상이 파도마다 표면으로 뒤집혀 나온다.”

“물은 일어나지 않은 일도 기억합니까?”

마레의 질문에 라엔은 도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비슷한 구조물이 있었을 수도 있지요.”

“제가 그린 관절을 썼는데요?”

“당신이 오래된 설계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레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 설계를 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말씀하시네.”

라엔은 대꾸하지 않았다. 관절 하나를 더 돌렸다. 벽 아래로 검은 입구가 드러났다. 옛길은 끊긴 것이 아니었다. 수로 아래로 내려가 벽의 기초를 통과하고 있었다.

“저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말하자 리브가 물의 높이를 살폈다.

“지금 들어가면 다음 썰물까지 못 나올 수도 있어요.”

“파도마다 벽이 나타난다면 물속에서 매개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견습 말이 맞다.”

라엔은 조사 도구를 접었다.

“다만 밧줄을 연결하고 들어간다. 물이 예상보다 빨리 차면 즉시 돌아오도록.”

마레가 자기 허리의 밧줄을 풀었다.

“연맹에서 온 사람을 빼놓고 방파제 안에 들어가려는 건 아니죠?”

네 사람의 허리를 하나의 밧줄로 이었다. 리브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나, 라엔, 마레가 따랐다. 수로의 물은 허리에서 가슴까지 차올랐다. 벽의 입구가 나타나는 순간 리브가 뛰어들었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자 세상이 뒤집혔다.

현재의 옛길 위에 다른 길이 겹쳐 있었다. 오래된 포석 사이로 매끈한 검은 판이 이어졌고, 양옆에는 청동 기둥들이 줄지어 섰다. 사람의 그림자들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들은 두 손에 짐을 들고 마을 밖, 깊은 바다 쪽을 향했다.

피난 행렬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았고, 누군가는 화덕 벽에서 떼어 낸 숟가락과 피리를 품었다. 얼굴은 물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바닥의 모래가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숨이 막힌 것은 물속이어서만은 아니었다.

행렬의 끝에서 하론과 리브를 닮은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론의 그림자는 동생을 벽 안으로 밀었고, 리브의 그림자는 형의 손을 붙잡았다. 다음 파도가 장면을 지웠다.

허리의 밧줄이 두 번 당겨졌다.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그 순간 청동 기둥 사이에서 물이 움직였다.

파도는 없었다. 그런데 투명한 덩어리 셋이 기둥을 휘감고 몸을 일으켰다. 물이 사람의 상반신을 이루고, 조개와 모래가 얼굴 자리에 몰렸다. 그들은 피난 행렬을 거슬러 우리에게 다가왔다.

리브가 몸을 돌렸다. 돌아갈 길은 이미 한 형상이 막고 있었다.

나는 허리의 채집통에서 납작한 조개껍데기 네 개를 꺼냈다. 물속에서 호명을 말로 전할 수는 없었다. 조개를 손등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밧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눌렀다. 방향을 읽는 배열이었다.

첫 번째 물 형상이 팔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가슴을 때렸다. 밧줄이 팽팽해지며 네 사람이 한꺼번에 바닥에서 떴다. 입에서 공기가 새었다. 라엔이 내 허리를 잡아 포석 쪽으로 눌렀다.

나는 첫 조개를 돌렸다.

물의 오라는 차가움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찾는 끈질김, 좁은 틈에서 더 빨라지는 성질, 맞닿은 모든 것을 같은 높이로 만들려는 무게였다. 눈을 감자 주변 흐름이 피부 위의 수백 가닥 실처럼 느껴졌다.

형상 셋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한 방향으로 밀리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방파제의 안쪽, 마을이 있는 쪽으로.

나는 리브의 어깨를 두드리고 아래를 가리켰다. 옛 포석 사이에 길고 좁은 배수 홈이 있었다. 현재는 모래에 막혔지만 잔향 속에서는 방파제 바깥으로 이어졌다.

리브가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허리에서 짧은 갈고리를 꺼내 모래를 긁었다. 마레도 망치 끝으로 돌 틈을 벌렸다. 라엔은 기둥 사이에 지팡이를 끼워 두 번째 형상의 접근을 막았다.

세 번째 형상이 위에서 덮쳤다.

물속인데도 거대한 파도가 머리 위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조개 하나가 손에서 빠졌다. 배열이 흔들리며 주변의 모든 흐름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장갑 아래 흉터가 뜨겁게 저렸다.

하나로 묶지 마라.

나는 남은 조개를 밧줄에서 떼었다. 세 흐름을 하나의 파도로 부르면 또 같은 실수를 한다. 첫 번째는 기둥을 돌아왔고, 두 번째는 바닥의 경사를 탔으며, 세 번째는 위에서 내려왔다. 모양은 같아도 길이 달랐다.

나는 조개 셋을 각기 다른 높이에 놓았다. 하나는 바닥 홈에, 하나는 청동 기둥에, 마지막 하나는 내 가슴 앞 밧줄에 끼웠다.

바닥의 물은 바닥으로.

기둥을 감싼 물은 벽 바깥으로.

위에서 떨어진 물은 우리 뒤로.

말하지 못한 호명이 손끝의 압력으로 이어졌다. 리브가 배수 홈을 막던 마지막 돌을 들어 올렸다.

물이 길을 찾았다.

세 형상의 몸이 동시에 길게 늘어났다. 조개와 모래로 된 얼굴이 무너졌고, 팔과 몸통은 배수 홈을 향한 세 줄기 흐름으로 바뀌었다. 물은 우리 발밑을 지나 방파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 힘에 막혀 있던 모래가 통째로 들렸다.

모래 아래에 네모난 돌문이 나타났다.

라엔이 먼저 손잡이를 잡았다. 네 사람이 힘을 합쳐 돌문을 열자 갇혀 있던 공기가 커다란 거품으로 솟구쳤다. 안쪽에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빈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차례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마레가 문을 닫았다. 천장 가까이에 공기가 고여 있어 간신히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 수 있었다.

리브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방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점검실 같군.”

라엔이 젖은 머리칼을 넘겼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지팡이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레는 벽을 더듬었다.

“오래된 방은 맞아요. 그런데 이건…….”

그가 벽 한쪽의 퇴적물을 손바닥으로 밀어 냈다. 진흙 아래에서 여섯 개의 둥근 홈이 드러났다. 홈들은 가느다란 골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뼈막대가 들어갈 만한 좁은 틈이 있었다.

나는 방금 라엔이 사용한 조사 도구를 떠올렸다.

글자도 그림도 아니었다. 관절의 위치와 연결 순서만으로 압력의 방향을 정하는 배열. 여섯 개의 접점 중 하나가 비어 있는 모양까지 같았다.

라엔의 도구와 정확히 같은 짜임이었다.

“선생님.”

그도 이미 보고 있었다.

“기록원의 표준 장비가 왜 이 벽에 있습니까?”

“표준 장비가 아니야.”

라엔은 예상보다 빨리 대답했다.

“제가 교육원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만 쓰셨죠.”

“오래전 조사에서 복원한 배열이다. 원형이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어디에서 복원하셨습니까?”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 밀랍을 꺼냈다. 벽의 홈 위에 얇은 종이를 대고 배열을 탁본했다. 이어 홈마다 밀랍을 눌러 채웠다.

“왜 막으십니까?”

“밖의 잔향이 이 접점을 통해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다.”

마레가 라엔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조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봉인하는 겁니다.”

“그쪽만 조사할 수 있게 만드는 걸 봉인이라고 부릅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좁은 공간의 수위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바깥의 물 형상들이 다시 나타나면 돌아갈 길이 닫힐 수 있었다.

라엔이 낮게 말했다.

“마레, 이 배열이 활성화되면 방파제가 아니라 헤아린 전체가 물의 잔향에 잠길 수 있습니다. 보존과 안전 중 무엇을 먼저 택할지 논쟁할 시간은 없습니다.”

마레는 끝내 손을 놓았다. 라엔은 마지막 홈까지 밀랍으로 메웠다. 그 순간 벽 바깥에서 길게 울리던 금속음이 끊겼다.

수면 위로 돌아왔을 때 존재하지 않는 방파제는 사라져 있었다.

안개가 걷힌 바다에는 현재의 낮은 돌벽만 남았다. 파도는 아무것도 피해 가지 않고 해안으로 밀려왔다. 청동 벽 너머로 보였던 높은 지붕들도, 두 개의 화덕 굴뚝도 없었다.

리브의 왼손에서는 피가 났다. 배수 홈을 열 때 깨진 조개에 베인 모양이었다. 그는 천을 감아 주겠다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손바닥을 바닷물에 씻은 뒤 갈대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마레는 한동안 바다를 보다가 내게 말했다.

“그 배열, 정말 기록원에서 쓰는 겁니까?”

“기록원의 공용 장비는 아닙니다.”

“라엔 조사관 개인 장비다?”

“오래전 유적에서 복원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유적 이름도 들었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청동 조각을 돌려달라고 했다. 라엔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증거물은 기록원이 보관하겠습니다.”

“재건 연맹도 이해 당사자입니다.”

“정식 인계서를 쓰죠.”

“그 인계서에 내가 발견한 장소도 정확히 적으십시오.”

라엔은 휴대 기록판을 꺼냈다. 얇은 점토를 고르고 뼈필로 조사 시각과 물건의 크기, 발견자를 새겼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문장을 읽었다.

「헤아린 북쪽 공동 화덕 배수로에서 청동 관절 파편을 수습함.」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장소가 틀렸습니다.”

라엔의 뼈필이 멈췄다.

리브와 마레도 기록판을 보았다.

“옛길 끝, 수중 점검실 앞에서 수습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화덕 배수로가 아닙니다.”

라엔은 잘못 새긴 글자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웠다.

“어젯밤 기록과 섞였군.”

그는 새 점토를 얹고 정확한 장소를 다시 적었다. 목소리에도 표정에도 흔들림은 없었다. 아주 작은 실수였다. 밤을 새웠고 손도 다쳤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밀랍으로 메워지던 여섯 홈이 자꾸 떠올랐다.

빈 접점 하나까지 닮았던 배열.

“견습.”

라엔이 인계서를 내밀었다.

“확인 서명을.”

나는 뼈필을 받았다. 기록판 아래쪽에는 내 이름을 새길 자리가 있었다. 첫 획을 대기 직전, 어젯밤 화염 형상의 입이 떠올랐다. 소리 없이 내 이름의 시작을 만들던 검은 틈.

나는 이름 대신 견습 호명자의 열린 고리를 그렸다. 조사에 참여했음을 표시하는 약식 서명이었다.

라엔은 아무 말 없이 기록판을 거두었다.

마을로 돌아가는 동안 물은 정상적으로 바다를 향해 빠졌다. 재도 보이지 않았다. 헤아린은 잠시 아무 일 없는 곳처럼 고요했다.

옛길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수면 위로 청동 기둥 하나가 솟아 있었다. 파도가 지나가자 기둥은 투명해졌다. 그 아래에서 여섯 개의 관절이 차례로 접히며, 누군가 바다 밑의 거대한 장치를 다시 맞추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쨍.

두 번 쉬고 다시 쨍.

라엔은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