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1장 · 1화
1화. 재가 바람을 거슬러
잔영기록자 · 한국어
재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언덕 중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닷바람은 분명 등을 밀었다. 외투 자락도, 길가의 마른 풀도 마을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잿가루만은 검은 눈처럼 우리 곁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갔다. 한 점이 손등에 내려앉았다가 피부의 미세한 떨림을 따라 꿈틀거렸다.
“손 대지 마.”
라엔이 지팡이 끝으로 내 손등을 가볍게 쳤다. 잿가루가 떨어졌다. 그는 길 가장자리의 돌 하나를 뒤집고 그 아래에 젖은 모래를 눌러 담았다. 모래 위에 숯 조각 셋을 엇갈려 놓은 뒤, 가장 가는 조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바람을 맞던 재가 잠깐 공중에 멎었다.
“무엇이 보여?”
“재가 바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나 볼 수 있지.”
나는 다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얼룩이 남은 곳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물에서 막 건져 올린 돌처럼 서늘했다. 잿가루가 지나간 길에는 타는 냄새보다 오래 닫아 둔 방의 냄새가 났다.
“불에 탄 직후의 재가 아닙니다. 열은 없고, 냄새가 너무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형상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어요.”
라엔이 입가를 조금 올렸다. 칭찬할 때마다 나타나는, 거의 알아보기 힘든 변화였다.
“무엇의 형상이지?”
나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잿가루는 바람에 밀리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가느다란 줄들이 앞의 줄이 남긴 빈자리를 되짚으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길이 아니라 행렬이었다.
“사람들입니다.”
“그래.”
라엔은 숯 하나를 치웠다. 멈춰 있던 재가 다시 언덕 위로 흘렀다.
“불은 물질을 태우지만, 화염의 오라는 마지막 방향을 붙잡는다. 누군가 문을 향해 달렸다면 그 조급함을, 무언가를 감쌌다면 그 굽은 어깨를. 오래 남은 기억은 실제보다 고집이 세지. 그러니 눈앞에 보이는 것을 곧바로 죽은 자라 부르지 마라.”
그 말은 교육원에서 수없이 들은 원칙이었다. 잔향은 사람이 아니다. 남은 동작은 의지가 아니다.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모두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른손 장갑의 매듭을 조였다. 손목 안쪽에 얇게 남은 흰 흉터가 가려졌다.
젖은 훈련장 바닥. 잘못 맞물린 돌과 구리. 내가 붙잡아야 했던 매듭이 손안에서 풀리던 감각. 반대편에 선 동료의 비명은 기억나지 않았다. 비명 뒤에 온 침묵만 또렷했다. 침식된 내 호명이 불길의 방향을 바꾸었고, 라엔은 맨손으로 연결을 끊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규칙이 너를 버린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나는 무엇이든 두 번 확인했다. 라엔이 확인한 것은 세 번 믿었다.
언덕 아래에는 수로가 여러 겹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집들은 낮고 둥글었으며, 지붕마다 물을 담은 청동 홈이 둘러져 있었다. 집 사이로 이어진 밧줄에는 조개껍데기와 푸른 유리 조각이 매달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맑지 않은 소리가 났다. 파도 소리에 무언가를 경고하려는 소리였다.
마을 이름은 헤아린이었다. 조수의 높이를 헤아린다는 뜻에서 붙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반기지는 않았다.
“기록원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첫 집 앞에 모여 있던 노인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라엔의 은회색 외투 깃에 박힌 작은 고리로 향했다. 잔향기록원의 표식이었다. 고리는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모든 기록에는 빠져나갈 틈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선임 조사관 라엔입니다. 이쪽은 제 견습이고요.”
내 소개는 늘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인은 내 얼굴을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묻지 않는 일이 고마우면서도, 오늘은 이상하게 허전했다.
“재는 사흘 전부터 저랬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아궁이를 꺼도 생기고, 비를 뿌려도 생깁니다. 아침이면 바다 쪽에 쌓였다가 밤이면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다친 사람은?”
“아직은 없습니다.”
대답이 늦었다. 라엔도 그 틈을 들었을 것이다.
“아직은?”
노인은 마을 중앙을 돌아보았다. 낮은 집들 너머로 유난히 굵은 연기 한 줄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공동 화덕에서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마을 중앙의 화덕은 집 한 채만 했다. 둥근 벽 안쪽으로 크고 작은 불구멍이 열려 있었고, 천장에는 수십 개의 솥과 건조대가 매달려 있었다. 생선을 말리고 그물을 삶고 겨울용 소금을 굽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일만이 아니었다. 벽면에는 죽은 이들의 숟가락과 깨진 찻잔, 손때 묻은 칼자루가 박혀 있었다. 헤아린에서는 누구든 세상을 떠나면 마지막으로 쓰던 물건 하나를 화덕 곁에 두었다.
그 한가운데서 하론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기록원 양반들이군.”
그는 도끼를 나무토막에 박아 둔 채 우리를 맞았다. 목소리는 굵었고 두 팔은 화상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래 화덕을 돌본 사람에게 생기는 흔적 같았다. 문제는 그의 뒤에 서 있는 또 하나의 형상이었다.
불이 사람의 높이로 일어나 하론의 어깨를 흉내 내고 있었다.
나는 곧장 허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라엔이 손목을 눌렀다.
“아직.”
불은 장작 사이에서 피어난 평범한 주황빛이 아니었다. 희고 탁한 중심을 검은 가장자리가 감쌌다. 형상은 하론이 몸을 돌리면 한 박자 늦게 따라 돌았다. 그가 팔을 들면 같은 팔을 들었고, 그가 숨을 내쉬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꺼졌다.
하론은 뒤를 보지 않았다.
“언제부터입니까?”
“이틀 전.”
“닿은 적은?”
“저놈이 먼저 피하더군.”
하론이 손을 뒤로 뻗었다. 불의 형상이 몸을 비틀었다. 피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작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허공에서 두 손을 모으고, 몸 앞에 무언가를 안았다. 그 순간 화덕의 불이 일제히 낮아졌다.
재 냄새 사이로 단내가 섞였다.
젖은 나무가 아니라 머리카락과 기름이 탈 때 나는 냄새였다.
화덕 입구에 서 있던 주민들이 웅성거리며 물러났다. 하론은 손에 묻은 나무 부스러기를 털었다.
“그래서 다들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누군가 급히 말했다.
“내 물건을 벽에 걸 자리를 골라 둔 사람도 있던데.”
하론이 웃었다. 웃음 끝이 거칠게 갈라졌다. 그는 강한 척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모두가 두려워할 몫을 대신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형.”
바깥에서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물동이를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하론과 닮은 눈매였지만 몸은 훨씬 가늘었다. 그는 하론의 동생 리브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수 길잡이로, 물이 빠질 때 드러나는 길과 바다 밑 골짜기를 읽는다고 했다.
리브는 불의 형상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물동이를 화덕 옆 홈에 붓고 우리 쪽을 향했다.
“없애실 수 있습니까?”
“먼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리브의 표정이 굳었다.
“불이 사람 흉내를 내는데, 그보다 더 알아야 합니까?”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교육원이라면 잔향의 밀도와 반응 범위, 매개물의 위치부터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브가 묻는 것은 분류가 아니었다. 형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라엔이 대신 말했다.
“오늘 밤까지 화덕을 비우십시오. 불도 최소한만 남기고요. 견습과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하론이 도끼를 뽑았다.
“불을 완전히 끄지는 않겠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오늘 바다에 나간 배가 셋이야. 돌아온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는 건 이 불이지. 헤아린의 불은 누군가 돌아오는 동안 꺼지지 않아.”
라엔은 더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었지만, 규칙이 생긴 이유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까지 마을을 돌았다. 잿가루는 모든 집에서 발견됐으나 쌓이는 곳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불을 많이 쓰는 훈연장보다 빈 창고에 더 두껍게 쌓였고,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는 사람보다 갓 태어난 아이의 요람 주위에 더 짙었다.
나는 재를 작은 유리병에 담고 채취 장소를 적었다. 라엔은 집의 방향과 문턱 높이, 물길의 깊이를 기록했다. 어느 골목에서는 갑자기 멈춰 서서 땅을 지팡이로 두 번 두드렸다.
“무언가 있습니까?”
“빈 곳이 있군.”
돌바닥 아래에서는 단단한 울림이 돌아왔다.
“지하실인가요?”
“마을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겠지.”
“확인하지 않습니까?”
라엔은 나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에 저녁빛이 얇게 걸렸다.
“모든 문을 첫날 열 필요는 없다. 먼저 어느 문이 우리를 부르는지 봐.”
그답지 않게 모호한 말이었다. 내가 다시 묻기 전에 그는 앞서 걸었다.
밤이 되자 바람이 강해졌다.
공동 화덕에는 하론과 라엔, 나만 남았다. 리브는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입구 바깥을 지켰다. 솥은 모두 내려졌고 장작도 젖은 천으로 덮였다. 하론이 지킨 하나의 불씨만 화덕 중앙에서 숨을 쉬었다.
우리는 바닥에 네 개의 접점을 만들었다. 바닷물에 적신 밧줄을 원으로 놓고, 동서남북에 납작한 돌을 괴었다. 돌 위에는 하론이 쓰던 부지깽이에서 긁어 낸 쇳가루를 얹었다. 불이 어떤 방향을 기억하는지 읽기 위한 배열이었다.
“접점을 부를 때 네 호흡만 세어.” 라엔이 말했다. “다섯 번째까지 잡고 있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과 놓는 것은 다르지.”
그의 시선이 내 장갑에 잠시 머물렀다. 나는 대답 대신 첫 번째 돌에 손을 얹었다.
오라는 보이는 빛이 아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물기가 빠져나가는 속도, 쇳가루가 서로 기대는 압력, 밧줄의 꼬임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힘이었다. 나는 그 미세한 방향들을 하나의 호흡 안에 모았다. 둘, 셋, 넷.
놓았다.
원 안의 불씨가 납작해졌다.
처음에는 실패한 줄 알았다. 다음 순간, 화덕 벽에 박힌 죽은 이들의 물건이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떨리고, 찻잔 조각이 벽을 긁었다. 바깥 골목에서 수십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쪽에서 시작됐다.
리브가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옵니다.”
잿가루가 문턱을 넘어왔다. 한 줄, 두 줄, 곧 바닥 전체를 덮을 만큼 많은 줄이었다. 재는 밧줄 원 앞에서 솟아올랐다. 머리와 어깨, 굽은 허리와 짧은 다리. 키도 걸음도 서로 다른 사람 형상이 열둘, 스물, 그보다 더 많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불타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비명도 장작 터지는 소리도 없이, 형상들은 골목에서 화덕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떤 것은 양팔로 아이를 감싼 자세였고, 어떤 것은 머리 위로 짐을 든 자세였다. 얼굴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하론이 숨을 삼켰다.
“저건…….”
행렬의 앞에 선 작은 형상이 화덕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벽에는 낡은 나무 피리가 박혀 있었다.
“아는 물건입니까?”
“오 년 전에 죽은 세피의 거요. 그런데 저건 세피가 아니야. 키도, 걷는 모양도 달라.”
잔향은 죽은 사람을 재현하고 있지 않았다. 죽은 이들의 물건을 향하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짓을 빌리고 있었다.
라엔이 지팡이를 가로로 세웠다.
“견습, 행렬을 끊어.”
나는 남쪽 돌을 발끝으로 밀었다. 쇳가루가 밧줄에 닿으며 검은 덩어리로 뭉쳤다. 밧줄 원이 찌그러지고, 화염 형상들 사이의 간격이 드러났다. 앞선 일곱과 뒤따르던 무리가 잠시 갈라졌다.
“하론, 불씨를 덮으십시오!”
하론이 젖은 천을 던졌다. 동시에 뒤쪽 형상 셋이 몸을 숙였다. 그들은 화덕이 아니라 하론을 향해 달렸다.
나는 두 번째 돌을 불렀다.
돌 아래 갇혀 있던 수분이 한꺼번에 끓었다. 증기가 낮은 벽처럼 퍼지며 형상들의 발목을 휘감았다. 첫 번째 것은 넘어졌지만 바닥에 닿기 전에 재로 흩어졌다. 두 번째 것은 팔을 길게 뻗었다. 불길 끝이 하론의 옷깃을 스쳤다.
타는 냄새가 났다.
훈련장이 겹쳐 보였다. 젖은 바닥, 풀리는 매듭, 손을 뻗던 동료. 내 호흡이 다섯을 넘었다. 돌의 수분이 바닥 아래까지 잡아당겨졌고, 화덕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놓아.”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을 풀지 못했다.
“견습. 나를 봐.”
그는 달려드는 불길 앞에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지팡이 끝이 세 번째 형상의 가슴을 받쳤다. 나무 지팡이는 이미 검게 타고 있었다.
“지금 놓으면 된다.”
나는 손을 폈다.
돌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증기가 흩어졌다. 라엔은 지팡이를 비틀어 형상의 방향을 바꿨고, 하론이 부지깽이로 젖은 밧줄을 들어 올렸다. 불길 셋이 매듭 안에 함께 갇혔다.
“마지막 접점.” 라엔이 말했다.
나는 깨진 돌 대신 바닥에 손을 댔다. 갈라진 틈 사이로 재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뜨겁지 않았다. 수많은 발이 같은 길을 되풀이할 때 생기는 묵직한 압력이 손뼈를 울렸다.
나는 그 압력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야 할 방향을 호명했다.
“흩어진 것은 흩어진 자리로.”
말은 명령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밧줄의 꼬임이 풀리고, 쇳가루가 모래처럼 퍼졌다. 갇힌 불길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사람의 팔과 얼굴을 이루던 가장자리가 무너져 재로 돌아갔다.
행렬 전체가 멈췄다.
수십 개의 빈 얼굴이 나를 향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입을 벌렸다.
눈도 코도 없는 얼굴에서 입만 검은 틈으로 갈라졌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이 있었다면 만들었을 모양을 나는 알았다. 교육원에서 교관이 출석을 부르던 아침마다, 라엔이 드물게 나를 이름으로 부르던 순간마다 보았던 첫 음절이었다.
내 이름의 시작.
형상은 그 한 음절을 끝내 소리 내지 못하고 부서졌다.
재가 화덕 바닥에 쏟아졌다. 뒤따르던 형상들도 차례로 무너졌다. 검은 가루가 무릎 높이까지 피어올랐다가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번에도 바람을 거슬러 언덕 쪽으로 흘렀다.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라엔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다섯을 넘겼지.”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네가 본 것부터 말해.”
나는 형상의 입 모양을 말하려다 멈췄다. 우연일 수 있었다. 잔향은 주변 사람의 동작을 베끼기도 한다. 내 기억이 두려움 속에서 익숙한 모양을 덧씌웠을 수도 있었다.
라엔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내 어깨 위에 그대로 있었다. 훈련 사고 뒤 깨어났을 때도 같은 무게가 있었다.
“하나가 저를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가 풀렸다.
“잔향은 관찰자를 비춘다. 네가 오래 들여다봤으니 네 흔적을 빌렸을 수 있어.”
“그렇겠죠.”
내가 듣고 싶었던 설명이었다.
하론은 젖은 천 아래의 불씨를 확인했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다가 바닥 한쪽을 보며 굳었다.
“저것도 끝난 거요?”
무너진 행렬 뒤에 형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른 잔향과 달리 걷지 않았다. 화덕 중앙에 누운 채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고 있었다. 몸 아래로 불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헤아린에서 죽은 이를 보내기 전 취하는 자세였다.
하론이 한 발 다가갔다.
누운 형상의 얼굴에 검은 균열이 번졌다. 재가 얇게 벗겨지며 눈썹과 콧날, 굳게 다문 입이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론은 자신의 화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